전화 한통으로 여는 아침

by 문성훈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지금 통화 돼요?....."
아침 일찍 건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든을 오래전에 넘기신 어르신이 내게 전화를 하는 경우는 대략 두가지다.
하나는 내 일정이 괜찮다면 신변잡기를 나누자고 하시는 거고, 또 하나는 상의할 내용이 있으실 때다.

어르신은 경북 출신이신데 서당에서 공부를 하시고 청년기에 상경해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처음 입주하면서 직접 쓰신 한자로 가득한 임대 계약서를 받아들고 그 필체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5층 건물의 4,5층이 주거용이라 건물을 짓고서는 쭉 사셨는데 작년에 자주 다니시는 병원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실 때도 나를 부르셨다.
"나도 몰랐는데 우리 애들이 ㅇㅇ 병원 뒤에 아파트를 마련해뒀다네. 허...참 그래 이사를 해야 어쩌나 생각중일세..."
나는 지병으로 오랫동안 거동이 불편하신데다 노인정 다니시듯 병원을 다니시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보다야 아파트가 나으실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살림살이까지 미리 갖춰놓고 편하게 모시려는 자식들을 두셔서 얼마나 좋으시냐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유치생 큰손자를 인근 학교 수영장에 데려다주시던 걸 낙으로 여기시던게 엊그제같은데 그 손자가 군대 제대를 했으니 참 오랜 인연이다.
그렇게 이사를 나가신 후로는 올라와서 차 한잔하자는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기회는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 당시에 전화하셔서 "시간 어떠냐?" 물으시면 아무리 바빠도 어르신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간혹 직원에게 1시간 뒤에 네게 전화해서 신호를 하라고 당부하고 뵈러 가기도 했다. 말씀을 듣다보면 2~3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있어서였다.
그러니 오늘 하신 전화는 상의할 내용이 있으셔서가 분명하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한 건물에 세들어 살기도 했고, 내 직업상 드는 손에 건물 관리하시는 걸 기꺼이 도와드리기도 해서인지 나에 대한 신임이 두텁다.
언제나 다른 층 세입자들이 들고 날 때면 그들에게 나를 먼저 만나서 상의하라고 하셨다. 어쩌다보니 건물 관리인이 된 셈이기도 한데 마다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른 세입자들이 어르신을 무척 어려워해서 애로사항을 나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해서였다. 내 기억으로 내가 청하거나 권했던 일은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오래전 부모님이 사무실에 오셨을 때 내 칭찬을 해주셔서 사업하는 아들 걱정을 덜어주시기도 하셨고, 아버지 장례식에 아들을 앞세워 불편한 몸으로 다녀가시기도 했다. 그때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고 처음이자 마지막 꾸중을 들었다.
어르신은 완고한 성격의 원칙론자다. 그리고 철저한 준법론자시면서도 사리를 먼저 따지시는 분이다.
건물에 사실 때는 노구에 어느 층에서 내다놓았는지 모르는 쓰레봉투를 펼쳐놓고 비닐과 종이를 손수 분리수거하시면서 역정을 내시니 세입자들이 어려워 했다.
건물 지하층은 원래 화장실이 없고 1층에 화장실이 있다. 어느 날 지하층을 쓰던 세입자가 불편하다면서 지하에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그런데 어르신이 자기 돈을 들여 만들어 주셨다. "내 건물에 세든 사람이 불편하다는데 내 건물이니 내가 해줘야지"하셨다. 그런 예는 삭막한 서울에서 보기 힘들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리에 어긋나거나 약은 꾀를 부린다 싶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니 다들 어려워하고 혹시라도 마주칠까봐 슬금슬금 피해다녔었다.

지금은 이사를 갔지만 꽤 오래 있었던 1층 세입자는 늘 내게 "어떻게 주인어르신은 문사장 말만 듣고 그렇게 편애하시냐"면서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 분은 나가시는 날까지 눈이 오면 건물 앞을 우리 직원과 나만이 눈을 쓸었다거나 명절이면 빠트리지않고 계단 청소하는 아줌마께 작은 정성이라도 전했다는 걸 모르셨다. 어르신은 그런 점을 높이 사시는 분이셨다. 그렇게 어르신이 나를 유독 챙기시듯 나 역시 어르신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업은?..."
"어디 예전만 하겠습니까. 저만 그렇지는 않들테니 잘 견뎌야죠 뭐..."
"걱정이구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상의할 내용은 임대료였다. 그제서야 월요일 출근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신 이유를 알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도 안꺼냈고 문사장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정하려고 해. 이제 생각한 건 아니고 내가 요즘 통 잠을 잘 못잡니다...."
말씀의 요지는 '다들 어려울텐데 임대료를 얼마나 낮췄으면 좋겠느냐?' '계약서를 새로 써야 될까?' '어느 시기까지 임대료를 낮춰 받아야겠느냐?'하는 것이었다.
우리 건물이 주변 임대료에 비해 낮은 편이기도 하지만 2002년 처음 입주하면서 쓴 계약서로 지금까지 지내 온 유일한 세입자인 나로서는 답변하기 난감했다.

결론적으로는 어르신이 고심하셨던대로 이번 달부터 30%를 삭감하고, 재계약 여부는 세무사사무실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낮춘 임대료의 기간은 이 사태가 언제까지 갈 지 모르니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시 얘기를 나누시는 게 어떠시겠느냐 말씀드렸더니 그게 좋겠다고 하셨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예사로 들리는 요즘이고보면 이런 문제로 편찮은 노인네가 며칠동안 잠을 못이루셨다니 감사하고 한편 안쓰러웠다. 게다가 지하와 1층이 비워져 있은 지도 오래됐다.

"그런데 목소리로 뵈어서는 건강이 좋아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휴 안그래...그나 저나 참 큰일입니다...." 바깥출입을 안하신지 오래되셨다니 통화가 된 김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끊었다. 가라앉은 일상이 계속되고 있는데 뜻하지않은 선물이 배달되어 온 기분이었다.
다음 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려서 안부를 여쭙고 이야기 동무가 되어 드려야겠다.

어르신은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을 빠트리지 않고 보시지만 귀가 어두우신 분은 아니시란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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