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세가지 죄

by 문성훈

'언론의 오보는 숙명이다.'

일견 일리있게 들리는 말이다. 작가이면서 언론에 몸담고있는 분의 글에서 이 대목을 읽었다.


언뜻 일리가 있어보이지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며 비루한 변명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이유에서건 오보가 있었다하더라도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정보도는 물론이고 뼈아픈 자성으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언론의 현작태를 보고 있자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의 언론이, 기자가 왜 이 지경에 놓이게 됐을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토록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세 가지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와 나태 그리고 방관이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법으로도 처벌받지 않는 죄지만 엄연하게 성립되는 죄다.

할아버지 세대에는 가난이 죄였다. 가난해서 자식을 굶기도 잃기도 했으니 평생의 한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아버지 세대에는 무식이 죄였다. 배우지 못해 당하고 살면서 그 원한을 자식을 통해 풀기를 염원했었다. 당신 배는 곯더라도 자식의 월사금은 어떻게든 마련했다.


지금의 우리 세대는 세 가지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스스로 무지함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알려고 하지않고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을 터부시하고 알고 있던 것에만 매달린다. 바깥 세상에는 귀와 눈을 닫고 내가 사는 세상에만 안주하려 한다.

사기는 처벌받는다. 사기꾼은 처벌받지만 사기당한 피해자는 위로 받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기 피해자도 죄를 지은 것이다. 무지해서 사기꾼에게 사기 칠 빌미를 제공했으니 죄를 짓게 한 죄가 있는 셈이다. 사기꾼은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있고. 현란한 혀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경계하지 먹이감으로 여기지 않는다.

무지해서는 안된다.

선거철만 되면 제삿날도 아닌데 큰 절을 올리는 같잖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한 여름 뙤약볕에 서있지도 않았는데 기절 해프닝을 벌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을 무지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해도 통했던 시대에 머물러있는 불쌍한 인간들이고 그것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믿음을 가진 무지 때문이라해도 결코 용서해서는 안된다.


무지와 나태는 이란성 쌍생아다.

언제나 손을 놓지않고 함께 다닌다. 게으름은 무지를 부르고 무지는 게으름의 결과다. 한번 더 생각하고 한층 더 깊게 파고들려하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다.

자신의 노력보다는 우상같은 존재를 만들어 받들고 믿어왔던 사실만 인정하려든다. 훨씬 편하고 간단해서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볍고 경쾌해서다.

사람들이 사이비 교단의 교주와 몰지각한 개신교 목사에 맹종하고 교활한 정치인의 감언이설에 현혹되는 건 자신이 게을러서다.

진실을 캐고자하는 열의는 실종되고 바깥 세상은 외면하면서 자신의 세계에만 안주해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은 머물러 있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갇힌 공간에는 곰팡이가 피기 마련이다.

뇌가 썩어들고 수족에 근육이 빠져 말라간다. 창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를 두려워 하지않고 몸을 일으켜 세상 바람에 맞서야 한다. 그래야 내장에서부터 썩어들지 않는다.


방관은 뻔뻔함이다.

나 하나 온전하면 그만이라는 착각,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 나중에 올라타려는 얄팍함도 뻔뻔함에서 기인한다.

내 자식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하든 지나치는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내게 당장의 위협이 안되고 피해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손을 놓고 방관하는 걸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닐 뿐더러 언제고 닥쳐 올 가까운 미래라는 걸 모른다. 남이 애써 쌓아올린 성과에 은근슬쩍 무임승차하길 즐긴다. 심지어 자랑스럽게 자식에게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죄의 승계 절차다.

내 집안에 쓰레기만 안보이는 어디에 방치되든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아직 지구 바깥 우주의 블랙홀로 내다버리는 기술은 없다. 후쿠시마 원전의 무서운 오염수가 동해안 물고기를 통해 내 몸에 축적되는데 1년도 안걸릴 지 모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만 떳떳하다면 검찰에 불려갈 일이 없으니 높은 나으리들에게나 해당되려니 생각하고 TV로 불꽃놀이 즐기듯 촛불의 장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루한 삶을 사는 지 자각할 능력조차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 자리를 찾은 검찰의 혜택을 어떤 사건 누구의 문제로 받게되든 나무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살다 가면 그만인 불쌍하고 죄 많은 인생이려니 측은해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ㆍㆍ


한국의 언론은 교활하고 잔인하다.

언론의 자유라는 허울좋은 면책특권을 누리면서 이 세가지를 서스럼없이 저지른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안된다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낌이 없다.

무지한 행세를 하고 게으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고 호도한다. 교주처럼 받드는 사주와 광고주와 의탁할 기득권에 굴종한다. 국민을 무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믿고 따르는 국민들이 여전히 있다고 믿어서다. 안타깝지만 전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예전처럼 많지 않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언론의 생명인 신뢰가 숨을 거두기 직전이니 그들의 목숨이 경각을 다투고 있다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지의 극치다.


책상머리에서 전화 한 통이면, 현장 취재만 해도 알 수 있고 실수하지 않을 일들을 지나치기 일쑤다.

게으르기 한량없다.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답을 정해놓고 이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영악하고 교만한 걸 영리하고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비대해진 몸집을 더 이상 추스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신뢰라는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날 그제서야 깨달을 지 모른다.

심폐소생술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수많은 호스가 꽂히는 고통을 맛볼 때 쯤이면 들 수 조차 없는 손으로 제 허벅지를 꼬집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언론은 기자는 태연자약하다.

나라가 국민이 어찌되건 자리만 보전하다보면 새로운 세상이 오더라도 온전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바뀐 세상이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됐다.

예전같으면 안타까워하고만 말 심판의 오판도 비디오로 잡아내고 바로잡는 세상이다. 지구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현장의 목소리가 뉴스보다 먼저 들리는 판국인데 제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비틀고 감추고 포장한 들 한계가 있다.

국민을 우물 속에 가둬두고 내 목소리만 들으라 하고 싶지만 이미 깨진 쪽박이고 드러난 바닥이다.

한국은 세계 속의 한국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정말 알려야 할 사실은 방관하고 달려가야 할 상황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한국 언론이 깨어있는 국민의 대열 앞으로 치고 나오려면 각고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수 밖에.....리는 말이다. 작가이면서 언론에 몸담고있는 분의 글에서 이 대목을 읽었다.


언뜻 일리가 있어보이지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며 비루한 변명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이유에서건 오보가 있었다하더라도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정보도는 물론이고 뼈아픈 자성으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언론의 현작태를 보고 있자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의 언론이, 기자가 왜 이 지경에 놓이게 됐을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토록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세 가지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와 나태 그리고 방관이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법으로도 처벌받지 않는 죄지만 엄연하게 성립되는 죄다.

할아버지 세대에는 가난이 죄였다. 가난해서 자식을 굶기도 잃기도 했으니 평생의 한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아버지 세대에는 무식이 죄였다. 배우지 못해 당하고 살면서 그 원한을 자식을 통해 풀기를 염원했었다. 당신 배는 곯더라도 자식의 월사금은 어떻게든 마련했다.


지금의 우리 세대는 세 가지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스스로 무지함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알려고 하지않고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을 터부시하고 알고 있던 것에만 매달린다. 바깥 세상에는 귀와 눈을 닫고 내가 사는 세상에만 안주하려 한다.

사기는 처벌받는다. 사기꾼은 처벌받지만 사기당한 피해자는 위로 받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기 피해자도 죄를 지은 것이다. 무지해서 사기꾼에게 사기 칠 빌미를 제공했으니 죄를 짓게 한 죄가 있는 셈이다. 사기꾼은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있고. 현란한 혀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경계하지 먹이감으로 여기지 않는다.

무지해서는 안된다.

선거철만 되면 제삿날도 아닌데 큰 절을 올리는 같잖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한 여름 뙤약볕에 서있지도 않았는데 기절 해프닝을 벌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을 무지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해도 통했던 시대에 머물러있는 불쌍한 인간들이고 그것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믿음을 가진 무지 때문이라해도 결코 용서해서는 안된다.


무지와 나태는 이란성 쌍생아다.

언제나 손을 놓지않고 함께 다닌다. 게으름은 무지를 부르고 무지는 게으름의 결과다. 한번 더 생각하고 한층 더 깊게 파고들려하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다.

자신의 노력보다는 우상같은 존재를 만들어 받들고 믿어왔던 사실만 인정하려든다. 훨씬 편하고 간단해서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볍고 경쾌해서다.

사람들이 사이비 교단의 교주와 몰지각한 개신교 목사에 맹종하고 교활한 정치인의 감언이설에 현혹되는 건 자신이 게을러서다.

진실을 캐고자하는 열의는 실종되고 바깥 세상은 외면하면서 자신의 세계에만 안주해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은 머물러 있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갇힌 공간에는 곰팡이가 피기 마련이다.

뇌가 썩어들고 수족에 근육이 빠져 말라간다. 창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를 두려워 하지않고 몸을 일으켜 세상 바람에 맞서야 한다. 그래야 내장에서부터 썩어들지 않는다.


방관은 뻔뻔함이다.

나 하나 온전하면 그만이라는 착각,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 나중에 올라타려는 얄팍함도 뻔뻔함에서 기인한다.

내 자식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하든 지나치는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내게 당장의 위협이 안되고 피해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손을 놓고 방관하는 걸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닐 뿐더러 언제고 닥쳐 올 가까운 미래라는 걸 모른다. 남이 애써 쌓아올린 성과에 은근슬쩍 무임승차하길 즐긴다. 심지어 자랑스럽게 자식에게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죄의 승계 절차다.

내 집안에 쓰레기만 안보이는 어디에 방치되든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아직 지구 바깥 우주의 블랙홀로 내다버리는 기술은 없다. 후쿠시마 원전의 무서운 오염수가 동해안 물고기를 통해 내 몸에 축적되는데 1년도 안걸릴 지 모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만 떳떳하다면 검찰에 불려갈 일이 없으니 높은 나으리들에게나 해당되려니 생각하고 TV로 불꽃놀이 즐기듯 촛불의 장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루한 삶을 사는 지 자각할 능력조차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 자리를 찾은 검찰의 혜택을 어떤 사건 누구의 문제로 받게되든 나무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살다 가면 그만인 불쌍하고 죄 많은 인생이려니 측은해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ㆍㆍ


한국의 언론은 교활하고 잔인하다.

언론의 자유라는 허울좋은 면책특권을 누리면서 이 세가지를 서스럼없이 저지른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안된다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낌이 없다.

무지한 행세를 하고 게으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고 호도한다. 교주처럼 받드는 사주와 광고주와 의탁할 기득권에 굴종한다. 국민을 무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믿고 따르는 국민들이 여전히 있다고 믿어서다. 안타깝지만 전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예전처럼 많지 않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언론의 생명인 신뢰가 숨을 거두기 직전이니 그들의 목숨이 경각을 다투고 있다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지의 극치다.


책상머리에서 전화 한 통이면, 현장 취재만 해도 알 수 있고 실수하지 않을 일들을 지나치기 일쑤다.

게으르기 한량없다.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답을 정해놓고 이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영악하고 교만한 걸 영리하고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비대해진 몸집을 더 이상 추스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신뢰라는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날 그제서야 깨달을 지 모른다.

심폐소생술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수많은 호스가 꽂히는 고통을 맛볼 때 쯤이면 들 수 조차 없는 손으로 제 허벅지를 꼬집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언론은 기자는 태연자약하다.

나라가 국민이 어찌되건 자리만 보전하다보면 새로운 세상이 오더라도 온전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바뀐 세상이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됐다.

예전같으면 안타까워하고만 말 심판의 오판도 비디오로 잡아내고 바로잡는 세상이다. 지구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현장의 목소리가 뉴스보다 먼저 들리는 판국인데 제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비틀고 감추고 포장한 들 한계가 있다.

국민을 우물 속에 가둬두고 내 목소리만 들으라 하고 싶지만 이미 깨진 쪽박이고 드러난 바닥이다.

한국은 세계 속의 한국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정말 알려야 할 사실은 방관하고 달려가야 할 상황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한국 언론이 깨어있는 국민의 대열 앞으로 치고 나오려면 각고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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