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몰락' (이것도 잘못된 말이다. '수구의 몰락')으로 일컬어지는 이번 21대 총선에서 미통당이 거의 유일하게 일궈 낸 승리는 '빅 스피커' 유시민의 목을 친 것 아닐까 싶다.
내가 거칠게 '목을 쳤다.'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는 '지식유통업'에 종사한다고 하지만 그는 고 노회찬과 함께 한국 최고의 정치 논객이기 때문이다. 그런 논객의 입을 틀어막은 건 날래고 용감한 적장의 목을 벤 것과 같다.
심층 분석이 가능한 예리한 시선과 폭 넓고 높은 경지의 이론으로 무장한, (더구나 오랜 정치경력과 행정경험까지 두루 갖춘 드문) 그의 목을 친 건 미통당이 이번 21대 총선전에서 거둔 최고의 성과다. 예컨대 미통당으로서는 수도권 의석 20석 이상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다. 진보진영으로서는 수구세력측의 종편을 비롯한 레거시 미디어의 정치평론 밥벌레들 100명을 감당하는 일당 백의 우군을 잃은 셈이다. 게다가 오염된 바이러스 묻은 비말을 튀기긴 했었지만 어쨌건 진중권같은 군졸도 반대진영으로 전향한 이후가 아닌가.
유시민을 제거한 건 박형준이다. 차명진(59년생)이 유시민(59년생))과 박형준(60년생)을 '친구'라고 했지만 유시민은 차명진의 말에 불쾌해하며 "오다가다 아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그에 비해 유시민과 박형준의 관계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이로 보인다. 그런데 박형준은 미통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유시민의 180석 발언을 '낚아 채서' 그들의 막판 선거캠페인에 활용함으로해서 상당한 성과도 거뒀고 유시민의 입도 봉했다. 선거라는 전쟁에서는 참패했지만 적어도 박형준과 유시민이 맞선 지원 전투에서는 박형준이 승리해서 다음 전쟁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나는 언젠가 유시민이 돌아오리란 기대는 하고 있고 반길 생각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박형준을 경계해야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중 한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우선 내가 싫어하는 모든 면을 두루 갖췄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데다 내가 역대 대통령중 가장 최악이고 수치라고 평가하는 MB 사람이다. 그런데 경계해야할 요주의 인물이다. 미소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으며, 알맹이 없는 주장을 부드럽고 현란한 말솜씨로 포장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점잖아 보이지만 실은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차라리 그에 비하면 격이 떨어져 보이는 '솔직한 홍준표씨'는 아이처럼 순수해보일 지경이다.
우리는 과격하거나 거칠지 않은 언사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런 수구인사들을 봐 왔다. 그들이 고졸출신 노무현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걸 종종 봐왔고, 진보측 인사들에게 격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써 온 걸 안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보수의 품격'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군부의 총칼앞에서는 가장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미국과 일본에 조공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사회 소외계층과 노동자에게는 야박하게 굴고 자신들의 기득권에는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강자에게는 굴복하고, 약자에게는 여지없이 매몰차다. '보수의 품격'이 아니라 '수구의 근본'이다.
나는 지난 여러 토론에서 박형준이 유시민이나 주진형같은 '임자'를 만났을 때 제대로 설득력있게 논리를 펴는 걸 보지 못했다. 학점의 권력을 쥐고 강단에나 설 수 있는 어설프게 박식한 폴리페서가 제격이다. 내가 싫어하는 '수구'의 모습을 제대로 다 갖춘 인물의 대표격이 박형준이다. 그들에게 '의리'는 조직폭력배들이나 쓰는 단어이고 '신뢰'는 계약서 문구에나 나오며 '약속'은 원래 없는 말이다.
박형준이 오랜 사적인 인연에도 스스럼없이 유시민에게 비수를 들이댄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고, 전략으로 포장된 탁월한 선택이다. 두 사람을 친구 사이라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의 연주를 알아주는 친구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백아의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와는 이 정반대 상황이 웃프다. 자신을 알아주던 사람의 목을 따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수구는 늘 누군가의 희생 위에 군림하고 그늘에 밀쳐두고 햇볕만 쬐어왔다. 생리현상을 참아가며 미싱을 돌렸던 여공과 석탄가루를 마시며 컨베이어 벨트를 오가던 산업연수생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지하철 수리공 그리고 평생 집 한채 갖는 것이 소원인 서민들, 실직과 당겨진 퇴직 연령에 전전긍긍하는 직장인들은 관심 밖의 사람들이고 선거에서 잠깐 큰 절 올릴 대상일 뿐이다.
선거에 참패한 이후 한 미통당 당선자가 '보수와 진보 양쪽 날개 운운'하는 소리를 했다. 옳은 말이다. 나 역시 늘 해 오던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미통당이 보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통당은 사멸시켜야 할 수구이고 극우일 뿐이다. 한국에서 보수는 민주당이다. 보수의 날개가 너무 크다. 기우뚱거리며 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시바삐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이 결집해서 세를 불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