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천하

by 문성훈

세상을 아직 모르던 시절 내 꿈 중 하나는 여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로 회자되는 그렇고 그런 학교말고 '어머니'를 양성하는 학교말이다. 나는 세상을 깨우는 힘이 여자에게 있다고 믿는다.

인디언 여인의 출산은 사뭇 경건해서 종교적이기까지하다.
인디언은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었다. 인디언 어머니는 아이를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순결한 언행과 명상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열려 있는 영혼에게 그가 위대한 신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쳤다. 홀로 떨어져 대자연의 숨결과 보살핌 속에서 아이를 낳아 안고 마을로 돌아온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갈래지만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대우받는다. 역시 자식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모계사회인 것이다.

인류 역사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에도 집 밖에서 태어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예수도 집에서 태어나질 않았고,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심지어 동굴에서 몸을 풀었다.

한국 역사에서 그런 여인이 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마리아와 앙징재처럼 낮은 신분이 아닌 반가의 여인 '송은 따님'으로 불렸던 김소강이다.
송은은 아버지 안동 김씨 김광수의 호이며 그의 다섯번째 딸이다. 그녀는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정승이 난다는 친정 마을을 찾았지만 친정 아비는 다른 가문에게 정승을 줄 수 없다하여 그녀를 돌려보낸다.
나이 열넷에 벌써 "정승 낳는 물"이라 소문난 마을 우물 흙탕물을 잔뜩 퍼마시고 정승 어미 될 꿈을 꾼 그녀가 쉽사리 포기할 리 만무하다.
기어이 마을 서쪽 숲에서 아들을 낳고야 말았으니 그 아이가 조선의 5대 정승중 한 명인 '류성룡'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20년 뒤 "공평하게 나누어주니, 윗대의 뜻을 받들어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라" 이르며 가문의 재산을 나눠준다. 맏아들 류운룡과 둘째 류성룡 조선의 두 걸출한 인물을 길러낸 실로 조선의 여장부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여장부를 말하자면 초계 변씨를 빼놓을 수 없다.
몰락해가는 사대부집안에 시집와 일찌감치 아들의 성정과 자질을 파악해 탁월한 무인으로 길러냈다.
그리고 그녀는 일찍 세상을 뜬 유약했던 남편를 대신해 가솔을 이끌었고 전란의 한 가운데를 헤쳐나간다.
문재가 뛰어났던 둘째아들을 일찍 잃고 집이 불타 큰아들마저 잃은 후에도 그 자손들을 직접 챙겼으며 전국의 집안 노비를 모아 재산을 불린다. 이렇게 불린 재산은 세째아들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했을 때 공평하게 나눠 줘 상속에 대한 불만을 없도록 했고, 이후에도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이듬해 전 가솔을 불러 다시한번 나머지 재산을 물려준다.
아녀자의 몸이지만 아산의 무관 집안 출신이었던 변씨는 바다와 뱃길에 밝아 아산항을 통한 일종의 무역으로 집안을 일으켰는데 그래서인지 역시 무관이었던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들이니 그녀가 후일 정경부인으로 봉하게 되는 '방수진'이다.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은 재력가이면서 명궁으로 소문난 무관이어서 사위인 이순신이 무과시험을 치를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가 사위에게 병학과 무술을 가르칠때 교관으로 도운 이가 바로 방씨 부인이다.

방씨 부인은 무장인 방진을 닮아 무예가 출중했는데 밤마다 남의 이목을 피해 숲속에서 남편 무술 상대가 되어 주었다. 방씨부인은 어릴 적부터 슬기롭고 영특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영특한 딸이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
이순신도 이런 부인의 인품과 덕을 칭송했음은 물론이다.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일찍 세상을 뜬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동문수학하던 친구였다.
이순신이 태어난 서울 건천동(지금의 충무로 일대)에서 맺어진 이들의 인연이 후일 임진왜란에서 조선를 구했으니 조선으로서는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의 류성룡과 '난중일기'의 이순신.
나라를 구한 두 영웅에게는 위대한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어머니였던 김소강과 초계 변씨 그리고 이순신의 부인 방수진이다.

변씨는 전란중 찾아 온 아들에게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이른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난중일기 中>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해 서울로 압송당한 아들 소식에 병중의 여든 셋 고령임에도"내 관을 짜서 배에 실어라"호령한 여장부였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어라"했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여사는 또 어떠한가?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위대한 사람 뒤에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세상 위대한 인물은 모두 여인에게서 나와 여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4월 28일(1545년 음력 3월8일)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이 나신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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