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우리와 경쟁하려 들지 않으며... 다른 세계관을 통해 지혜나 실패같은 가치들을 알려주어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김연수가 말한 '소설을 읽은 이유'다.
나의 실개울같은 식견으로 감히 소설을 말할 수는 없지만 뚜렷하게 짚어 낼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가치가 있기에 오랜 세월 사람들은 소설을 쓰고 읽는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부모의 염원으로 위인전을 읽으며 자란 세대인 내가 청소년기 읽은 소설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두 편의 작품이 있다. '차탈레이 부인의 연인"과 "주홍글씨"다.
차탈레이 부인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던 손길이 떨리고 심장 박동을 귀로 들을 수 있었으며 아랫도리가 주체할 수 없이 팽창해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일련의 흥분 상태는 잊혀지질 않는데 줄거리보다는 장면과 묘사만 떠오르는 '차탈레이 부인의 연인'과 달리 '주홍글씨'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줄거리와 주인공이 어제 읽은 소설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미 차탈레이부인은 아무런 화제거리도 감흥도 못일으키는 소설보다 진하고 자극적인 현실를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다시 한번 들춰보고 싶지는 않은데 1세기 뒤에 쓰여진 너세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21세기에 이르러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되새김질 하게 만든다.
"주홍글씨"에는 부당한 권력 구조, 이르지 못할 이상향을 추구하며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 음험하고 비열하며 나약한 인간의 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성에 고뇌하는 인간 본연의 선량함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져 있다.
정당해 보이지도 필연적이거나 관례라고 여길만큼 과거 사례도 없었던 발단과 전개로 쓰여지는 현대판 "주홍글씨"를 연작으로 읽고 있다.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야 하는 주인공 '헤스더'가 한 가족으로 확대되고, 도움을 받았어도 모른체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이웃이 국민이 됐으며, 복수심에 불타는 헤스더의 남편 '칠링워스'는 의사가 아닌 권력을 가진 검사로 더 교활하고 의도가 불순하며 부도덕한 인물로 변모했을 뿐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는 이 소설의 결말을 섣불리 말하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결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청교도적인 도덕관도 지혜나 선량함도 가지지않은 현실 속의 재판관 판결이 무슨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다만 내가 아닌 타인에게 행사하는 부당하거나 과도한 무형 무형의 폭력에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며 순백의 영혼과 티끌없는 삶을 살아오지도 앞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떠한 결말이 나든 조국 장관의 가족은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가야 한다.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형제와 처와 자식에게 새겨진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부덕을 곱씹을 것이며, 처는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도달하려 했던 남편의 이상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울타리로만 여겼던 부모가 가시덤불로 바뀐 세상에서 자식들은 세상의 이목을 의식하며 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 가족에게 주홍글씨를 새길 자격이 있는지, 그들이 이런 멍에를 써야 할 만큼의 죄를 지었는지 궁금하다. 법관의 판결이 법전과 양심에 따른다면 그보다 더 냉엄하고 진실에 가까운 판결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내려진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법관이란 자들이 얼마나 권력에 무력하며 편협하고 이기적인지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안간힘을 쓰며 주홍글씨를 새겨 감옥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검찰도, 검찰의 노리개로 때로는 조력자로 광란의 춤사위를 시연하는 언론도, 마녀 사냥으로 자신의 추악함은 감추고 추종자를 선동하는 정치인과 셀럽들도 영악하다.
영악한 자들은 두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 자신이며, 다른 하나는 대상이 되는 타자다. 영악한 자는 자신이 당하기 전에 타인들을 기만하면서 상황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타인들의 무지에 편승한다. 타인들이 이해하도록 돕기보다는 그들을 무지 속에 남아 있도록 방관하거나 거짓으로 속여 그들을 이용하려 든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그 '타자'이며 그를 이용하려는 또 다른 영악한 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영악한 자들은 대중을 기만하고 우롱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게 되는 구조이고 이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악순환이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검찰이 쓰기 시작한 이 추리소설이 법정에서 코미디 각본이 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미 우리는 미스터리 소설로만 남을 것만 같은 '세월호'를 읽고 있다. 이 모두가 다큐멘터리로 기록되고 영원히 남겨 질 우리 세대의 일그러진 초상로 자리잡길 바란다.
나는 영악할 수는 없지만 영악한 자들에게 희롱당하는 무지한 대중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설사 그리 된다해도 발버둥은 치려고 한다. 그래서 21세기의 '주홍글씨'인 이 소설을 방관과 무관심이라는 서랍에 넣고 닫으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진행형이거나 완료형이다. 진행형으로 남겨두어야 실패의 지혜로 위안이라도 가질 수 있다. 조국 가족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가족인질극으로만 매듭짓고 덮는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퇴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