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금을 안믿기로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불안을 안고 살았다. 엄마의 손금때문이었다.
올해 팔순이 되는 엄마의 생명선은 긴 편도 아닌데다 중간에서 끊겨있다. 머릿 속으로 아닐거야 부정하며 당신의 손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기억도 희미할 만큼 오래됐다. 그 질기고 강력했던 미신의 끈을 잘라버리려고 한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선친의 생명선은 짙고도 길었다. 일흔 넷이라는 장수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생을 사셨다. 그 긴 생명선이 새겨진 손금의 미신이 지켜주지 못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아직도 날을 받아 출산하고, 길일에 결혼식장이 미어터지고, 윤달에 수의를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권에 살고 있다. 시험날 미역국을 먹지 못했고, 엿을 들고 수험을 치뤘으며 4층이 없는 건물에서 복이 나간다길래 다리를 떨지 않고 직장생활을 했다. 물론 서양인인들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들 역시 13일의 금요일에는 외출을 꺼려하고 검은 고양이라도 마주칠까봐 노심초사하며 7이라는 숫자에 연연해하며 산다.
"선생님은 저 색깔 팬티만 몇 벌이셔..." 얼마전 떠났던 담양 여행에서였다. 새벽에 깨서 거실에 앉아 시린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에서 주무시던 선생님이 기침하셨다. 방문을 열어두시고 주무셨기에 인사드리느라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바지를 챙기시던 선생님 팬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 팬티였다. 사모님께서 놀리시듯 웃으며 하신 말씀이다. 차가운 은(銀)이 당신과는 맞지 않다고해서 멀리 하신다고도 했다. 당연히 자식의 결혼을 허락하기 전에 궁합부터 보셨다. 젊은이 못지않게 시대 변화를 빨리 읽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신 분인데 그러하다. 짐짓 멋쩍으셨던지 그 날 죽녹원 국수집에서 이런저런 담소끝에 선생님은 "살아온 날이 그러하니.... 이해하소"라고 하셨다. 물론이다.
나 역시 결혼 전에 궁합을 봤다. 신실한 카톨릭신자셨던 장모님께서 보셨다. 혼기가 꽉 찬 두 사람이 연애만 하고 결혼을 서두르지 않으니 애가 타셨던 모양이다. -다분히 내 탓이었다- 일부러 대구 팔공산까지 올라 도사인지 점쟁이인지 찾으셨단다. "대가 끊기고... 부부간에 불화가..." 점쟁이가 일러 준 말을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저희 부모님께도 말씀드릴테니 조만간 결혼식 날 잡으시죠"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가 그랬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어디서 점쟁이 따위가... 지 죽는 날도 모를거면서...." 아마 그때는 젊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처형이 어디선가 알아보고 넌즈시 아내에게 알려 준 가지말라는 방향으로 굳이 이사를 했다. 장모님이 찾으셨던 점쟁이의 이후 소식은 모르겠지만 나는 딸, 아들을 순서대로 낳아 200점을 받은 아비가 됐고, 누구 못지않게 금슬이 좋으며 숱한 이사를 다녔음에도 그리 흉한 꼴은 당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손금에 전전긍긍하던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이런 것들은 온전히 내 의지와 결단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아직 내 인생은 진행형이라 섣불리 속단할 수도, 미지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