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며 면전에서 퇴박을 맞은 경험이 두번 있다. 한번은 자리를 비운 상사를 대신해 임원의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서류가 내 눈앞에서 날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고 - 당시는 비일비재했다- 또 한번은 책임자가 되어서 고객인 모기업의 왕회장에게 브리핑을 하다 면박을 당했다.
첫번째는 내가 올린 기안에 빨간 줄이 그어지거나 착오나 실수로 되돌아오는 경우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다고 여겼던 시절에 일어났다. 나는 아무말 없이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서두르지않고 한장 한장 결재판에 챙겨담아 임원실을 나왔다. 다시는 그 서류를 올리지 않을 참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임원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왜 다시 안올려?" - 아무리 살펴봐도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럼 물어봐야 할거 아냐" - 먼저 던지셨잖습니까. 그래서 다시 여쭤볼 생각을 안했습니다 "이놈 봐라" - 저 이놈 아닙니다. ooo입니다.
숨은 속사정이 있다. 내가 올린 기안은 예상에 없던 추가 예산이 집행되야 하는 사안이었고, 담당 임원은 그 일로 인해 심사가 몹시 뒤틀려있었다. 나를 비롯한 부서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어쩌면 상사도 그래서 담당자인 내가 직접 올리게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과는 못받더라도 임원의 행동 -엄한 화풀이- 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당돌하고 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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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모기업의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하던 중에 있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왕회장실을 -이미 아들에게 기업을 승계했기에 다들 그리 불렀다- 비롯한 주요 간부가 근무하는 층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느닷없이 현장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사 중단하랍니다" - 왜? "그게.... 참...."
왕회장이 현장을 다녀갔는데 벽체와 천정에서 쓰고있는 석고보드가 암을 유발한다니 다른 자재로 -예컨대 합판같은 걸로- 재시공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엄연히 잘못된 정보였다. 아마 어디선가 당시 문제가 되고있던 석면에 관한 보도를 접하셨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그 회사 관계자와 회의를 가졌다. 다들 문제가 안된다는 걸 이미 알고있었다. 아들인 대표이사까지도... 문제는 감히 누가 지엄한 왕회장의 지시를 뒤엎을까하는 것이었다. 내가 왕회장님을 설득하겠다고 했다. 이미 디자인 프리젠테이션할 때 뵙기도 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뵙고 말씀을 드려야 했다.
그동안 공사현장은 손을 놓고 있었다.
첫 대면에서부터 퇴짜를 맞았다. 다시 제품설명서를 첨부해서 뵈었다. 또 꿈쩍도 안한다. 그 회사 총무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표님께서 재시공하면서 추가되는 비용은 지불할테니 비용때문이면 왕회장님 지시에 따르라고 하십니다" 비용때문만은 아니라고 몇 차례 더 뵙고 그래도 안되면 그리하겠다고 전해달라 했다.
명확하게 틀린 건 틀린 것이고,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했다. 지금까지 애써 작업한 노력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싫었다. 논문 자료를 찾아서 또 찾아 뵈었다. 또 퇴짜. 퇴짜...퇴짜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약속도 잡아주지 않았다. 임시로 마련된 회장실 입구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다 따라 들어갔다. 석고보드를 생산하는 두군데 기업에 의뢰해서 받은 시험검사서로 설명을 드렸다.
벌컥 역정을 내셨다. "아 내가 이팝(쌀밥) 먹겠다는데 왜 자꾸 보리밥 먹으라 그래.... 니 맘대로 하라" (왕회장은 월남하신 분이다.)
또 실패다. 서류를 싸서 조용히 물러나왔다. 그런데 회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트를 기다리는데 자리에 함께 했던 전무님이(창업멤버로 당시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 쫓아 나오시며 나를 불러세웠다.
"문실장.됐어. 다시 공사 재개해" - 네? 역정을 내시던데.... "맘대로 하라시잖아. 그건 해도 좋다고 허락한다는 말이야"
이미 내가 두 번 정도 뵈었을 때 회장은 알고 있었단다. 자신이 잘못 알았다는 것을... 하지만 일찌기 한번 한 지시를 거둬들인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인정하기도 싫어서 버티고 있었는데 내가 집요하고 끈질기게 찾아뵈니 모르는 척 허락한 거라고 했다.
나는 남녀노소, 지위고하, 학력의 차이를 불문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정작 하고싶은 말을 애둘러서 혹은 다른 핑계를 가져다 하는 걸 싫어한다. 속내는 감추고 다른 이유를 들어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사람은 만정이 떨어진다. 이런 성정탓에 사회생활에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고, 오해를 받은 적이 있지만 고쳐지지도 않거니와 이제와서 고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좀더 표현이 유해지고 느긋해졌다고는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불만이 있으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뻔한 속셈을 알고 있는데 가장 약한 지점을 노려 그럴듯한 말과 글로 모략하려는 못된 버릇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내세우기 부끄러운 이유라면 아예 들먹이지를 말고, 한두번 실패한 책동이라면 이제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인정해서 거듭나야 한다. 나이 먹은 게 벼슬도 아니고, 영원한 지위와 권력도 없다. 어른 노릇하기 어려운 세상이고, 아무리 틀어막고 감추려고해도 이미 열려진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