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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un 01. 2020

평범하게 위대하게...

".... 조선백자 항아리입니다. 10년을 두고 봐도 싫증이 나지 않고 더욱더 반해 가기만 합니다. ....
그저 평범한 항아립니다. 빛깔에 이어서도 그저 평범한 빛깔 백색입니다. 이 평범한 빛깔, 평범한 형태가, 그것도 금이 가고 주둥이가 떨어진 이 항아리들이 왜 그리 사람을 반하게 합니까.....

항아리의 매력은 역시 한마디로 말해서 아름다워서일 것입니다..... 어디가 어때서 아름다운 것인가, 또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직관을 통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조선항아리는 철두철미 평범합니다...... 술항아리, 김치항아리, 젓항아리, 약항아리, 곡식 또 무엇 무엇 항아리, 어쨌든 우리들의 생활에 따르는 평범한 항아리들입니다......
평범이란 말과 감각은 자연스럽다는 말과도 통할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한 것, 자연한 물건, 조선항아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닭이 알을 낳듯이 자연에서 출산한 것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기교와 재조와 계획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한 형태, 자연한 빛깔은 도공의 무심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녹로와 더불어 자연과 합치되었던 것입니다. 무심의 경지에서 가지 않고서는 자연과 합치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위대한 미 슬픔을 만들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과거에도 자기를 애완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그랬습니다. 문방구 등의 물건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용기는 거의가 부엌살림에 쓰는 일종의 소모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자기들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의식이란 천의무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그만 지식과 개성은 외려 망치는 것입니다. 오직 자연에 맡겼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고나 하까요.

그래서 이루어진 자기는 진실로 소박하고 단순하고 건전하고 원만하고 우아하고 따뜻하고 동적인가 하면 정적이고 깊고 또한 어딘지 서러운 정이 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아름다운 자기가 되었습니다.
회백, 청백, 순백, 난백, 유백 등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것 가지고는 도저히 들어 맞지가 않습니다.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하늘처럼 싸늘한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 여하튼 빛깔에 대한 어감은 우리 미족의 고유한 특질인 동시에 또한 전통이 아닌가 합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에세이 中에서....>



족히 20년은 됐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젊고 자신만만한 디자이너였습니다. 충천한 자신감이나 튀는 아이디어만큼 직관과 감성이 무르익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패션 매장 디자인을 의뢰받았는데 당시 백화점에 입점하는 고급 숙녀복 브랜드였습니다. 몇날 며칠을 머리칼 쥐어뜯으며 고민하다 국내외 디자인서적을 뒤적거렸습니다.
그러다 이탈리아의 한 의류매장 사진을 보게 됐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눈에 띄는 소품도 없는 덩그러니 비워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는 벽체가 유일한 파티션인데 그마저도 큰 망치로 두드려 꺤 듯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회벽 안 벽돌이 드러난 그 커다란 구멍을 통해 건너편 회벽에 한 줄로 이어진 행거에 걸린 옷 몇 벌이 전부인 사진이었습니다.

길게 가지를 뻗은 금이 간 회벽과 둥그렇게 뚫린 구멍이 인테리어의 전부인 매장이었지요.
얼어붙었던 그 날부터 다시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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