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인다. 뜬금없이 생각나는 사람 때문에 들고나간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덮고 일찌감치 카페를 나섰다. 아침에 지은 밥도, 쌈채소도 남았는데 별로 찾지않던 라면으로 저녁을 떼울 참이다. 몇 번 면을 건졌다 담그기를 반복한다. 단순한 라면 조리과정에서 면을 탱글탱글하게 하는 이제는 비법이라 할 것도 없는 누구나 아는 동작이다.
문득 사람도, 삶도 이렇겠구나 싶다. 세상이라는 냄비에 담겨 끓고 있는 인생이라니, 어느새 나는 자궁 속 웅크리고 꼬불꼬불 말렸던 그대로를 지키려는 면발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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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라면은 물의 양을 맞추기가 쉬운듯 어렵다. 500ml는 숫자일 따름이고, 괄호 속 2와1/2컵은 암호나 다름없다. 어느 집이나 계량도구가 비치되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컵마다 크기는 제 각각이다. 그러니 제 눈대중을 믿기 마련이다. 누구나 짜게 하려면 적당히 적게, 싱거운 걸 좋아한다면 적당히 많게 붓는데 익숙해져 있다. 빡빡하게 살면서 진하게 우려나올 것이지, 성글고 밍밍한 맛으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물에 맵고 짠 스프를 푼다. 무릇 오욕칠정이 그러하다. 눈물나게 맵게도 싱겁게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맑았던 이전의 그 물이 아니다. 애초의 어린 아이는 지금 어디에고 없다.
그렇게 냄비 속은 끓고 있다. 저마다의 인생이 줄달음치고 있다. 면발에 얼마나 양념이 배여야 맛있을 지 나는 모른다. 제조사마다 배합비율이 다를테지만 그 조차도 각자 조절할 수는 있다. 감히 당신의 뜻을 알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주어진 전부를 혹은 조금만 덜어 낼 것인지는 정할 수 있다. 다만 다시 털어넣을 수는 없다.
맛을 더하고 싶어 파나 김치를 넣기도 하고 계란을 풀어 내기도 한다. 때로 명란과 젓갈을 쓰는 경우도 봤다. 특별한 삶을 살고 싶다면 따라해봄직하다. 재주를 부리고 취미를 가지거나 특기를 살릴 일이다. 어느 타이밍에 넣느냐도 중요하다.
요리는 불 조절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센 불 혹은 은근한 불에서도 라면을 끓일 수는 있다. 격정적으로 뜨뜻미지근하게 살다 갈 수도 있다. 그래도 면발은 익기 마련이고 인생은 삶긴다. 어쨌든 냄비 속에 끓여 나올 인생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라면이 날 것에서 익어서 밥상에 오를 동안 냄비 밖을 나오는 순간은 면발을 건져 올릴 때 밖에 없다. 태초의 꼬불거리던 모습, 그 탄력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바깥 공기를 쐬는 순간이다. 제가 담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세상을 만나는 소중하고 유일한 기회다. 책이든 여행이든 혹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일을 하게되든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만나고 부딪쳐야 한다. 두려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라면 봉지를 뜯고 나면,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밀려나온 그 순간부터 우리는 밥상에 올려지고, 제단에 신주로 올려질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냄비 밖으로 비집고 나와야 한다. 한 김 빼고 그 뜨거운 삶 속에 다시 담겨지길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차츰 뜨거워지는 물 속에서 꿈쩍도 하지않고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감사해야한다. 좌절하고 다시 시작하고, 후회하고 또 저지르고, 원하지 않던 순간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래야 한다. 한번, 두번, 세번... 세상에서 건져올려질 때마다 용틀림하듯 제 모양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나를 뜨겁게 달구는 게 센 불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은근하게 삶겨 미리 퍼져버리는 인생이 아니라서 얼마나 행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