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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1. 2020

그림자 예찬

현실은 그림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생충'의 봉준호감독와 교분이 두터운 '어느 가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입봉작(데뷔작)이 '환상의 빛(1995)'입니다.
고백하건데 아시아 아니 이제는 세계적 거장이 된 두 사람의 작품을 그리 즐겨하지도 다 보지도 못했습니다.
보는 내내 앓습니다. 묵직한 그 무엇을 한동안 떨쳐버리지 못하니 편한 마음으로 다가서질 못하는 겁니다. 말수는 적지만 신비로운 얘기를 숨긴 채 옅은 미소는 띄지만 서늘하기까지한 첫사랑의 근처만 배회하는 사춘기 소년 같습니다.

그래도 두 거장의 영상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시선은 차갑지 않습니다. 제게는 고레다의 '환상의 빛'이 그랬고 봉준호의 '마마'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빛'의 반대말은 '어둠'일텐데 저는 '그림자'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입니다. 영화나 제 작업에 있어 조명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세계는 빛이 도달해야 비로소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저는 그림자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상의 빛'에서 보여주고자 한것이 터널에 감춰진 어둠인지 혹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형체인지 아니면 터널끝 빛의 세상인지 저는 단정짓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고레다 감독이 어둠에 감춰진다고해서 아무 터널을 택하지도, 희미하게 드러나는 터널 벽의 질감을 지나치지는 않았으리란 믿음은 있습니다.
빛보다 그림자는 많은 말을 해줍니다. 더 명료하게 실체를 드러냅니다. 제게 '그림자'는 그렇습니다.

십여년 전 백화점의 피부 관리샾 작업을 할 때였습니다.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가꾸는 곳입니다. 그런데 실내는 어두워야 합니다. 고객을 응대하는 상담공간은 밝고, 실제 피부관리가 이뤄지는 실내는 어둡습니다. 상담시간은 짧지만 맛사지를 하는 시간은 깁니다. 어둠속에서 가꾼 결과가 밝은 세상에서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매장의 로고와 싸인을 벽과 같은 하얀 색으로 칠했습니다. 반대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컬러보다 질감, 사이즈보다 디테일에 더 연연해합니다. 음영만으로 실체가 드러날 때 더 강렬하다고 ,쉽사리 보이는 것보다 집중해야 보이는 것에 더 주목하게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고 콘티를 짭니다. 디자이너의 일도 비슷합니다. 스토리를 만들고 스케치를 합니다.
최근에 한 카페의 작업을 마쳤습니다. 저는 이제껏 묵혀뒀던 지하 공간간을 물에 잠기게 하고 싶었습니다. 수초 조경을 한 커다란 수족관을 고요하게 유영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나서야 펜을 들었지요.
지상의 소음이 굴절되어 스치는 바람처럼 들리고 공기의 흐름이 심연의 해류처럼 흐르는 공간. 거기에 수조와 유목을 심었습니다.
뭍이든 바다든 빛은 어디에고 다다릅니다. 빛는 일렁이는 물결에 흔들리고 유목을 비출 때면 우리의 상상력이 닿는 온갖 그림자를 만들어 냅니다. 해저면에 뿌리를 내리거나 해류를 따라 떠다니는 유목, 꽤 오랜 시간을 조명과의 거리 방향에 따라 다르게 그려지는 그림자를 쫒아다녔습니다만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짐작컨대 대부분의 사람은 그림자보다는 빛을 사랑합니다. 컬러를 좋아하고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낍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걸 못견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빛과 그림자는 늘 공존합니다. 하루의 절반은 늘 어둠 속에 묻혀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번갈아가며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림자를 기억하는데 인색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형체와 컬러도 아무리 강렬한 빛에도 그림자는 늘 한결같이 우리의 허울과 허위를 벗겨냅니다.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에만 반응합니다. 가까운 빛에는 윤곽만으로도 제 모양을 알려주고 먼 빛에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를 일깨웁니다.

하나 둘... 빛과 빛이 모여 사방을 비추면 마침내 그림자는 사라지고 우리는 현실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 '환상의 빛'에 눈부셔할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저는 그림자를 사랑하겠습니다. 진실은 그림자에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터널의 어디쯤에 서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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