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개이지 않아도 태풍이 앞으로 몇 개가 더 지나갈지 모르지만 어김없이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제게 추석은 기일 일주일 전 임을 알리는 알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아버지를 모신 절도 당일에는 출입을 할 수 없으니 올해는 저와 남동생만 하루 이틀전에 단촐하게 다녀오는게 어떻냐고 하십니다.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기일에도 아직 어린 조카들과 제수씨, 간만에 친정나들이를 하는 여동생네 식구도 못오게 하는게 어떻냐고 하셨는데 그건 좀 고민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손주들 보고싶으실텐데 온 식구 모이는 걸 좋아하셨는데 정작 아버지께는 여쭤볼 수 없으니 조금은 답답합니다.
사촌형들이 많아 아버지 돌아가시고나서야 제주가 됐습니다. 어려운 격식보다는 정성으로, 예를 다하기보다 기억하고 함께 하는 날로 지내왔습니다만 올해는 코로나로 그마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잔정을 보이는 분도 아니셨고 특히 장자인 제게는 유독 엄하셔서 아버지를 추억할만한 머시멜로우 같은 이야깃거리가 없습니다. 암 선고를 받으신 후 제가 큰 병원을 수배하고 수속을 밟으며 모시고 다니니 제 등 뒤에서 어머니께 "저 놈이 그래도 제법 똑똑하네"라고 하셨던 걸 들었던 게 철들고 제가 들은 유일한 칭찬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그걸로 반항해 본 기억은 없습니다.
제게있어 아버지의 사랑은 담배 연기로 기억됩니다. 대입 학력고사를 며칠 앞두고 심하게 앓았습니다. 실컷 놀다 거의 한달동안 벼락 치기로 해내려니 몸이 견뎌낼 리도 없었던데다 정신적이 압박감이 더해져서 일겁니다. 처음으로 혼절이라는 걸 경험했습니다. 어머니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고 며칠 뒤 중요한 시험을 치를 아이라고 몇번을 강조해서인지 주사약이 독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잖아도 의식이 혼미한데 약기운에 또 까무러졌습니다. 그런 지경인데도 아버지는 단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중에도 "이번에 시험 안봐도 된다. 대학교 안가도 좋으니 살기만 해라" 어머니의 기도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이 들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저를 키우며 그렇게 심하게 아픈 걸 처음 보셔서 무척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이틀인지 사흘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눈이 떠졌던 건 시험 당일 새벽이었습니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자욱한 안개를 봤습니다. 따뜻한 안방 아랫목을 내어준 아버지는 유리창 미닫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작은 방에 계셨습니다. 그 방에 자욱한 연기가 끼어 있었습니다. 말씀 한마디 없으셨어도 얼마나 애가 타셨던지 한잠도 못주무시고 담배를 태우셨던 겁니다. 제가 고집을 피워 고사장에 갈 때도 돌아와 그 길로 다시 까무러져 며칠 뒤 자리를 털고 나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걸 말입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자주 영정을 모십니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얼굴을 잊어버릴까봐,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에서입니다. 납골당에서는 스마트폰으로 할아버지 생전의 영상을 틀어놓습니다. 할아버지를 못 본 조카가 둘이나 됩니다. 그래선지 그 녀석들이 하부지를 압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제일 막내 꼬맹이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연방 '하부지'하며 까르르 좋아합니다.
ᆞ 여느 집이든 조카들은 이모를 좋아하기 마련이지만 제게 있어 막내이모는 특별합니다. 그야말로 어머니와 진배없는 사랑을 주셨기도 했지만 당신 자식도 아닌 조카인 저의 재수 뒷바라지를 해주신 분이십니다. 전업주부도 아니고 밤늦게까지 약국을 하셨는데 매일 새벽 따뜻한 아침상과 정성스런 도시락 두 개를 한번도 빠짐없이 챙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학원 제일 뒷자석를 차지하고 삼수생 형들과 노느라 그리고 처음 한 연애질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죄송스러움까지 더해져 지금도 어버이 날에는 항상 이모께 전화를 드립니다.
이모댁에는 늘 제일 작은 방 하나가 비워져 있었습니다. 그 방에 이모의 시아버지 영정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신혼에 시집살이를 하셨는데 무척 고되셨다고 합니다. 깐깐하고 매몰찬 시어머니 쿠세(성격. 어르신들은 그리 말씀하십니다)에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부리려고만 드는 못된 시누이가 넷이라고 했던가 다섯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랬습니다. 부잣집 막내딸로 시집와 가난한 살림에 매일같이 그 많은 식구의 밥을 지어대니 허리 펼 시간도 손이 마를 날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간혹 먹성 좋은 식구들 때문에 솥이 비면 이모는 누룽지를 긁어 담아드셨나봅니다. 그럴 때면 하루에 말 한마디를 잘 안하시는 과묵한 시아버지께서 "아가. 나도 누룽지가 먹고싶으니 좀 줘봐라"하시며 당신의 밥을 덜어주고 누룽지를 같이 드셨답니다. 그런 날이면 부엌에서 한참을 혼자 우셨다고 합니다.
그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매일 아침이면 상차림 하기 전에 제일 먼저 푼 따뜻한 밥을 시아버지 영정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문안 인사인지 대화인지를 하고 나오셨습니다. 당신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 작은 방에는 영정이 올려져 있을 겁니다. 이모가 "이렇게 잘 살고 손주들 잘 된 거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하시는 걸 자주 뵈었습니다.
사랑이 유행가 가사보다 흔하고 스낵처럼 소비되는 세상, 사랑이 넘친다고들 하지만 늘 목말라하는 시대에 당신들을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