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야

by 문성훈

영화 중에 남녀가 혹은 부녀지간에 몸이 서로 바뀌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소재로 한 것들이 있었다. 가끔 딸과 아들이 서로 성격이 바뀌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부지불식간에 입밖으로 꺼냈던 경우도 있었다.
딸은 나를 닮아 직설적이고 뚝뚝한 편이다. 오히려 아들은 살갑고 애교가 많다. 그래서 딸에게는 애교도 부리고 아빠한테 살갑게해라 퉁을 주고 아들에게는 엄친아 싫으니 선굵게 행동하고 사고도 좀 치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바램에 그칠 뿐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타고난 성정이 그런가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꼭히 그렇지만도 않다. 아빠로서의 이런 생각과 말을 반성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의 책에 실린 에피소드 한 토막을 읽다 울컥해져서 괜히 딸에게 미안해졌다.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후 학회운영 구상에 골몰하던 그는 어느날 5살 난 딸 니키와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학회일로 가득하고 늘 시간에 쫓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린 딸은 잡초를 뽑아 하늘로 던지고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딸의 그런 모습에 냅다 고함을 지르자 딸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뒤 다시 정원으로 나온 딸이 다가와 말했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인데, 니키?"
"아빠는 제가 다섯살이 되기 전까지 어땠는지 기억하세요? 그때 제가 굉장한 울보였잖아요. 날마다 징징거릴 정도로. 그래서 다섯번째 생일날 결심했어요. 다시는 징징거리며 울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그건 지금까지 제가 한 어떤 일보다 훠린 힘들어요. 만일 내가 이 일을 해내면 아빠도 신경질 부리는 일을 그만두실 수 있을 거예요."
셀리그만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고 깨닫게 됐다. 자신이 얼마나 신경질쟁이였는지. 그리고 지난 10년동안 자신은 햇살 가득한 집안을 오락가라하는 먹구름 같은 존재였음을.

그 순간 니키는 내 딸이었다. 숨이 멈칫하고 목젖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신경질쟁이고 늘 먹구름처럼 집안을 오갔던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러니 내게 하는 얘기였다. 우리 딸이 그 나이때 나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을 새고 들어오기 일쑤였고, 모처럼 집에서 쉬는 날에도 일에 골몰하거나 밀린 잠을 자야해서 아내가 안방문을 닫아주고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놀렸다.
딸은 잔병치레가 많았는데도 늘 웃는 아기였다. 주사를 맞고 눈꼬리에 눈물이 달렸는데도 금새 생글거려 마음 아파하는 엄마를 달래줬다. 잠투정도 없었고 아침이면 늘 환하게 웃으며 안방문을 열고 기어왔다. 쇼핑을 할 때도 식당에 갔어도 졸다 웃다 손뼉치며 혼자 놀며 까르르대던 순하고 이쁜 아기였고, 고집피울 나이가 됐어도 뭘 사달라 어디가자 보채는 법이 없었다. 낯을 가리지도 않아 누구 품에서도 잘 웃으니 늘 사랑받던 아기였고 바쁜 아빠더러 놀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들은 늘 부산스러웠고 개구쟁이라 가만히 혼자 두질 못했다. 고집도 셌고 언제나 놀아달라고 징징거렸다. 아내는 두살터울로 동생이 태어나는 바램에 아직 아기였던 딸이 큰아이 취급받으며 큰 걸 지금도 마음 아파한다.

딸이 내게 처음으로 부탁을 했던 것은 중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앞으로 미술을 하고싶다고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을 때였던 같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미술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견디고 헤쳐나간 아이다. 사랑스럽던 그 아이가 어느덧 스무세살 아가씨가 됐다.

이어령교수가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밤이 있다고 했다.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새 잠옷을 자랑하고, 굿나잇 키스를 받고 싶었지만 글쓰기에 푹 빠진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방 밖에서 “아빠, 굿나잇” 하고 인사했다. 글의 호흡이 끊길까 봐 아버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흔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말 ‘굿나잇’을 해주지 못한 게 너무 아프다고 했다.
나 역시 항상 정다운 굿나잇을 해주지 못했고 잠옷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한 아빠였다.

다행히 우리 딸은 아직 우리 품에 있고 늦게 집에 들어간 날이면 모처럼 솜씨를 발휘한 토마토스프 맛을 봐달라며 내게 가져다 준다.
예민하고 신경질쟁이인 아빠의 심사를 늘 살피는 착한 심성을 지녔고, 엄마를 가장 많이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안락사하는 날 관리하던 유기견이 눈에 밟혀 안고 온 정많고 눈물많은 아이다.
첫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던 날 10만원이 든 봉투를 아빠용돈이라며 내밀었고 그렇게 번 돈을 모아 해외 여행을 다녀오는 당차고 기특한 아이다. 경비를 아껴 가장 비싼 선물인 향수를 아빠를 위해 사온 속깊은 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딸을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나 더한 욕심을 부린 걸까.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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