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 화장대 그리고...5(에필로그)

by 문성훈

밤 10시가 다 돼서야 사무실을 나왔다. 나서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다.

"주무십니까? 이제 출발할라꼬 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금이 몇신데 밥 묵으러 온다는 기고 도대체 니는..." 야단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건강하시다는 반가운 징후다. 예상했던 바이고 대비도 해뒀다.

"이제껏 저녁도 못묵고 일했다...인자 나갈라고..." 이럴 때는 모성애(?)를 자극해야 한다.

"뚝..!" 전화가 끊겼다.

이 또한 단련된 지 오래다. 엄마의 아들로 살아온 지 반백년을 한참 넘긴 내가 아닌가. 시집 온지 스무두해를 넘긴 아내는 아직도 이런 시어머니의 통화습관에 적응이 안돼서 이미 끊긴 전화기에 대고 혼자 얘기하곤 한다.
전화요금이 비쌌던 시절. 장거리와 시내전화를 구분짓던 때의 옛 습관이다. 당신의 용건만 말하고 끊는 것이다. 아마도 전화를 끊자마자 새 밥을 안치고 국을 덥히고 계실거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다.
"존나... " 거리에서 한쌍의 거플이 나누는 대화에 거듭되는 욕설이 거슬린다. 주인공은 젊고 늘씬한 아가씨다. 남자는 달래고, 여자는 선물받은듯한 꽃다발을 쥔채 연신 큰소리로 "존나..."를 외쳐댄다. '혹시라도 아들이 저런 여친을 데려오면 어떡하지?' 너무 앞선 걱정을 하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엄마한테 가려면 9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급행이어서인지 앉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쌍의 젊은 커플 중 여자가 하나 남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남친의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나보다. 선물로 뭘 해야 기뻐하실지 상의하고,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잘해드리라는 얘기를 건네는 아가씨가 마음씨처럼 이쁘다. 나이가 드니 마음이 얼굴보다 먼저 보인다.
30분전 걱정스럽고 불편했던 기억이 이들로 인해 가시는 듯했다.

"할매. 나 왔어" '할매'는 내가 엄마를 부르는 애칭이다. 짐짓 화가 나신척 싱크대 앞에서 아무런 대꾸를 안하신다. 이미 밥상은 새색시처럼 곱게 차려져 있다. 파김치, 오이무침, 더덕장아찌, 깻잎양념장, 김치. 그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 일색다. 밥상 앞에 앉으니 막 푼 고봉밥과 불고기를 내어오신다. 역시 오늘도 과식이다.
사진을 찍으려하니 김치를 찢어주던 손을 휘저으며 훼방놓으신다.
"뭔 사진이고... 별스럽게...뭐 있다고..."
내겐 인사동 10만원 한식과도 바꾸지않을 진수성찬이다.

한참 늦은 야간식사를 하고 엄마 동창분들 근황부터 시작해서 "요즘은 무슨 노래, 어느 가수에 꽂히셨는지" 여쭤봤다. 아니나다를까 아이돌에 빠진 소녀팬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고 화제(話題)가 풍부해진다.
이전까지 한참 이뻐하시던 '박서진'에 이어 새로 '홍원빈'이란 가수를 발굴하신 모양이다. '차오름'이란 골퍼 출신 가수의 인생역경 스토리는 덤이다. 모두들 이름으론 발라드 가수지만 트로트가수들이다.
덕분에 나는 홍원빈이란 가수(엄마의 말을 빌자면 요즘 뜨는 최고 인기 가수다)의 노래를 몇 곡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어디 그 뿐인가 같은 곡을 두고 여러 곡을 원래 부른 나훈아와 리바이벌한 홍원빈을 비교해서 들어야 했다.

아무튼 요즘 한국 가요계의 대세(?)는 홍원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