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직장이란 말조차 생소해진 지금이지만 첫 직장이 가지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는 않습니다.
회사의 실무 책임자로 있을 때 일입니다. 인턴사원으로 대학 졸업반인 두 학생을 받았습니다. IMF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취업이 무척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병역은 마쳤지만 서른이 다된 늦깎이 남학생과 같은 과 어린 후배인 여학생이었습니다. 껑충한 키에 호리호리한데다 희멀건한 인상인 남학생과 여자치고도 무척 작은 키에 큰 눈을 가진 여학생이었습니다. 별명이 모나미였지요.(모나미 볼펜엔 'MonAmi 153'라고 적혀있습니다)
대표와 저, 제 아래로 30명정도 직원이 있는 인테리어회사로서는 꽤 큰 규모였지만 한번에 두 사람을 입사시키기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의 회사는 경력사원을 받길 원합니다. 밤낮없이 야근이 상시화된 일과에서 신입사원 교육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턴을 받는 조건으로 두 사람중 한 사람만 정직원으로 채용한다고 당사자에게 사전고지했고 회사 내부방침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누가 누락될지 자명했습니다. 남학생은 내성적이어서 다른 선배사원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다 디자인 감각도 아이디어도 부족했으니까요. 무엇보다 근무태도 때문에 다들 자기 팀에 들이기를 꺼려했습니다. 독실한 개신교라서 일요일은 반드시 쉬었고, 다른 선배사원이 평일에 야근을 할 때도 정시가 되면 혼자 퇴근하는 통에 모두의 눈밖에 난 상황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여학생은 눈썰미도 좋고 뭐든 배우려고 하고 싹싹한 성격이어서 다들 좋아했습니다.
당시 저희같은 업종의 회사에서는 막내가 복사와 잔심부름을 전담하다시피 했었는데 남학생은 그런 일마저 후배 여학생에게 미뤘습니다.
아무도 일을 안맡기니 하루를 허송세월하는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본인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회사에 어떤 프로젝트가 돌아가는지 팀별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되기에 그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거기에 실무감각을 익히려면 선배들의 디자인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그런 경험은 드뭅니다. 모르긴 해도 저희 회사가 아니더라도 그 친구를 입사시킬 회사는 좀체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대표가 저를 불렀습니다.
"문실장. ㅇㅇ씨(남학생)는 이제 그만두게 하지.... 영...."
"일단 조금 더 두고 보시죠.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대표이사실을 나와서 제 방에서 그 친구와 면담을 했습니다.
"ㅇㅇ씨 지금 맡은 일 있어?"
"아뇨. 뭐 특별히 맡은 일은 없습니다."
"아무도 안시키니까... 자네에게 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거야. 앞으로 이쪽 계통으로 일을 하긴 할거야?"
"네. 그래서 전공도 그쪽으로 택한 겁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설계쪽으로 재능이 없어보여. 게다가 시공쪽은 성격상 전혀 맞지도 않을것 같고... 혹시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이 안가진 재능이 있어?"
"컴퓨터 만지는 걸 좋아하는데... CAD나 포토샾은 다들 하시니까.... 3D MAX(투시도)를 다룰 줄 알긴 합니다."
"그래 차라리 그 쪽이 낫겠군. 그럼 이렇게 하지. 앞으로 출근하면 하루종일 뭐가 됐든 투시도 한 장씩을 그려서 퇴근 전까지 나한테 가져다 주는거야. 내가 팀장들에게 일러서 일체 다른 일은 자네에게 시키지 않게 하지. 어때?"
"예."
물론 3D MAX를 좀 다뤄봤다는 초급수준이라 초기 그림은 유치원생의 그림일기만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맘편하게 제 하고싶은 걸 하고 하루종일 프로그래밍 책을 뒤져가며 익히다보니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팀장회의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실장님. ㅇㅇ씨는 특혜 아닙니까. 다들 바쁜데 하루종일 뭘 하는지... 직원들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 그럼 ㅇㅇ씨를 팀원으로 받아들일 팀은 있고? 한번 손들어 봐. 어느 부서로 보내줄까?"
"......... ......"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인턴 계약기간이 종료될 시점이 됐습니다. 대표이사와 마주앉았습니다.
"문실장 이제 한 사람은 내보내지. ㅇㅇ씨를 내보내는 게 좋겠지?"
"이거 한번 보시죠" 나는 그동안 그 친구가 내게 제출한 그림들을 기간별로 펼쳐 보였다.
"이제 제법 쓸만한 투시도를 그립니다. 두 사람 다 입사시키죠. 제가 제대로 쓸테니까."
"음...... 알았어"
그렇게해서 그 친구는 저희 회사에서 3D MAX를 전담하며 몇 년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베테랑이 된 거지요. 성격도 태도도 변함없었지만 업무의 성격상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던 어느날. 그가 제게 면담 신청을 했습니다. 퇴사하겠다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직원이 사직서를 들고오면 싸인부터 하고 이유를 묻습니다. 꽤 오랫동안 품안에 사직서를 넣고다닌 끝에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누구가 그만둔다는 말을 수없이 하게되지만 실행에 옮길 때는 나름 작정하고 계획을 세운 다음에야 제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후 얘기를 들어봐서 잠깐의 충동적인 선택이거나 회사 문제때문이라면 설득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서 자기 손으로 사직서를 찢게 합니다. 정말 아까운 직원이라면 다른 직장을 경험한 후에 다시 불러들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오래 다니거든요.
"왜? 무슨 문제가 있어? 아니면 이직하려는 거야?"
"아닙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요. 유학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열심히 해봐."
"그럼 이번 달 말일까지만 일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아니 오늘부터 인수인계해서 이번 주 내로 정리하자. 그리고 금요일에 회식 자리를 갖거나 나하고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나머지 절차는 관리부에 일러둘께"
인원이 적은 회사일 수록 그리고 업무가 분장되어 있을수록 한 사람의 빈 자리는 큽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끼치는 심리적인 영향이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만둔다고하면 주변 동료들의 일손도 잘 안잡히고 이런저런 말들도 많아집니다. 사내 분위기도 괜히 들뜨고 싱숭생숭해집니다. 그래서 되도록 결정이 되면 빨리 정리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또 몇년 흘렀습니다. 그동안 저 역시 그 회사를 나와 독립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