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의 세계

by 문성훈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고 지금의 직장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정경일테니 부디 감안해서 읽어주길 바란다.

"아니 퇴근할 때 다돼서 이걸 주면 어떡해요. "
앙칼진 K대리 목소리를 듣게 된 건 화장실을 가던 도중이었다.
점잖고 순하기로 소문난 우리팀 J과장은 A3도면을 한 손에 쥔 채 그녀 앞에 엉거주춤 서있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선생님에게 꾸중듣는 초등학생처럼 뒷통수를 긁적이고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이 상황이 꽤나 민망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당시는 모든 직원이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바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우리회사는 주업무인 인테리어부서 안에 시공팀, 설계팀이 있었고 나는 인테리어 부서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 밖에 전시회등을 맡는 이벤트팀, 그래픽팀, 관리팀등이 있었는데 K대리는 그래픽팀에서 팀장역할을 맡고 있었다. 회사 창립 멤버이기도 하고 사장이 각별하게 대우하니 그 기세등등함에 상급자인 과장들도 그러려니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냐는 태도로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지냈다.
그날은 다음날이 기획안 마감일이라 좀 늦게라도 도면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던 J과장이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던 중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당시 IMF로 운영하던 회사를 접고 두문불출하다 스카웃되어 이 회사에 입사한 말하자면 '굴러온 돌'이었다. 업무프로세스상 우리 부서에서 도면작업이 끝나면 그래픽팀으로 넘겨 디자인 후반 작업을 해야했다.
그런데 유난히 그래픽팀은 특별부서처럼 행동하고 목에 풀먹인 것처럼 고개를 빳빳히 들고 다녔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희소한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사장의 편애도 한 몫 하는 것 같았다. 근태도 가장 여유로운 편인데다 평소에도 정시퇴근을 했으니 촌각을 다투고 중요한 일은 야근을 할만도 한데 퇴근시간 가까워서 일을 넘겼다고 직장상사를 닥달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밤을 샌 후라 신경이 곤두 서있기도 했지만 평소 그녀의 행동거지를 마뜩찮게 여기고 있었다.
"너 뭐냐? 위 아래도 없어? J과장이 니 아랫사람이야. 다들 밤샘하는 거 안보여. 상사가 하라면 하는 거지 니가 뭔데 늦게 넘겼다고 지랄이야. 니가 무슨 사장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돼냐? 어디서 건방지게... 시끄러! 일하기 싫으면 회사 그만 둬"
안다. 욕도, 마지막 말도 안하는 편이 나았고 삼가해야하는 것도. 그런데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장 귀에 들어갈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의도가 섞인 발언이기도 했다.
그녀의 서슬퍼렇던 기세는 질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당혹감과 분노가 스치면서 눈물이 맺히려는 걸 본 것도 같다.

아무튼 다음날 아침. 짐작했던 대로 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문실장. 왜 그랬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사장이 출근하자마자(아니면 전날 이미 통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장실로 들어가는 걸 이미 봤다.
나는 전날 저녁에 있었던 상황과 평소 업무에서 느꼈던 애로사항, 개선방향까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브리핑했다.
"꼭 그래야겠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제대로 일을 하기위해서는 그렇게 해야합니다."
나는 강경했고 사장은 난감해했다. 나는 K대리과 나. 둘 중 한사람을 선택하셔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으면서 사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회사의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래픽팀이 인테리어팀에 귀속된 것이다. 내가 가장 강력하게 요구했던 사안이었다. 자연히 K대리는 내 팀원이 됐다.
책상배치를 새로 하게 됐는데 그녀를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 했다. 그녀로서는 나의 동정과 하루 일과를 지켜볼 수도 했지만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장은 일이 우선이고 꺼리낄 게 없다면 어디서 누구와 마주앉게 되든 상관없다.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업무시간 중에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고있다가 내게 호된 질책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그녀는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아마 그 포트폴리오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퇴근 무렵...브리핑하시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식 항의 드립니다."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 낸 건 이 대사가 낯설지않아서다.
거기에 "아이. 진짜 너무하네, 진짜"라는 추임새까지 곁들여진다. 이쯤되면 욕만 안했지 꾸지람이다.
대통령도 들었다 놨다 한다고 착각하는데 장관쯤은 위세당당한 그들 안중에 들어올리 없다.

기자들의 퇴근이 몇시로 정해져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6시 20분이 되기 전에 브리핑은 끝났다. 기자가 법무부 소속 직원도 아니니 싫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있다.
펜과 녹음기도 없이 전 대통령 얘기만 공손하게 경청하던 그들이다. 미국대통령이 준 질문기회에도 꿀먹은 벙어리였던 그들이다.

서슬퍼렇던 독재정권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쉬고 시키는대로 받아적고 기사로 내보냈던 그들이 민주화된 세상의 햇볕은 가장 먼저 쬐고 방종에 가까운 자유도 마음껏 누린다. 가짜뉴스. 과장되고 왜곡된 기사를 써갈겨도 음침한 독방에 감금되는 시절이 아니니 나오는대로 하고싶은대로 한다.

그들 스스로 기자 역시 퇴근시간에 목을 매는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걸 명백하게 밝히고 싶은 모양이다.
안다. 이미 알고있다. 사주의 목줄에 끌려다니고 기자의 사명, 언론인의 자세 따위는 진작에 엿바꿔 먹었다는 것을....
그런데 왠지 나는 이 장면이 처연하고 안쓰럽다. 굳이 제 입으로 밝힐 필요까지 있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을 그들끼리만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사를 짜깁고 재단하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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