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근로'는 같은 말인데 어감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한국은 '근로자의 날'이다. 엉덩이나 궁둥이가 다른 부위는 아닐텐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굳이 '히프'를 고집한다. 좀더 배운 티를 내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원한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하루를 헐겁게 보내는 날이 계속될 수록 슬며시 조바심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품을 팔지 않으면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노동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식이건 기술이건 몸뚱아리를 놀리지 않으면 밥벌이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다.
하지만 그저 밥을 먹기위해서만 일을 해야한다면 삶이 너무 괴롭고 굴욕스럽다. '밥벌이의 괴로움'은 노동하는 사람이 짊어진 멍에다. 누구나 생계를 위한 '밥벌이의 괴로움'을 떨치려고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다. 우리 사회는 노동의 '신성함'이나 '공익성'으로 쓴 약을 둘러싼 당의정을 만들어낸다. 그렇더라도 '괴로움'이라는 쓰디 쓴 본연의 맛을 감출 수는 없다.
자신의 침으로 오래 씹어 조금이나마 단 맛을 느끼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 그 침은 노동의 의미다. 자식의 입으로 들어가는 흰 쌀밥이나 새집으로 이사한 날 감격해하는 아내의 눈물같은 것이다. 그처럼 타인에게서 노동의 의미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신의 노동으로 타인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게 한다거나 남이 할 수 없는 성취를 이뤄냈을때 훈장처럼 주어진다. 노동으로써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거나 자신의 가치가 돋보이면 한층 의미는 더해진다. 자부심으로 이어지면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 보다 나은 기여를 하게된다. 그래서 마침내 대우가 높아지고 명예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노동'은 품격을 더하게 된다.
노동과 근로라는 말에서 보듯 노동은 '더럽고 힘들다.'는 인식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한다. '괴로움'과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노동'일지언정 땅바닥에 내려놓고 싶지는 않다. 나라는 존재와 필연적으로 연결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노동의 가치를 머리와 사지로 나눠 그 값으로 매기려는 사람, 남의 '노동'을 빌어 인생을 즐길 시간과 돈을 사는 사람, 와인잔을 부딪치며 '노동'을 입에 올리지만 정작 해본 적은 없거나 노동에 비해 턱없는 사치를 누리는 사람이다.
이제 사실 여부는 밝힐 수 없게 됐지만 선친께서 생전에 내 이름 중에 '성'자는 본디 '성할 성(盛)'자로 작명을 해왔는데 '정성 성(誠)'자로 잘못 기재됐다고 하셨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딱 내가 한 만큼만 돌아왔다. 딱히 운이 따랐다는 일도 없었거니와 행운권 추첨에서조차 당첨된 기억이 없다. '왕성하고 성대하다'는 의미인 '성(盛)'자를 썼다면 다른 운명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어쩐지 온 정성(誠)을 기울여야지만 좋은 결과가 나왔고, 죽자 사자 매달려야지 그나마 바라던 걸 가질 수 있었다. 그저 공으로 주어지는 것은 없었던 삶이다. 나는 그 정성(誠)이 노동이고, 성할 성(盛)은 요행이거나 행운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의 탄력이나 가속도로 살아야하는 시간을 맞고 있다. 자칫 방향을 잘못 잡았다가는 돌이킬 힘도 부칠테고 함부로 속도를 높이다간 연료가 부족하거나 엔진이 과열해서 멈출 위험이 있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다. 그 댓가가 나를 표현하고 남과 소통하는 즐거움이기에 밥벌이처럼 괴롭지 않고, 즐거우니 밥벌이의 지겨움까지 떨쳐버릴 수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