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책상 한귀퉁이에 그대로 있었다.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2주일은 지난 것 같다. 너댓시간 눈을 혹사하고나면 목이 마른다. 나는 눈과 목마름의 연관성을 알지 못한다.
벌써 오래전에 먹다가 남은 마지막 귤이다. 집어드니 바짝 마른 껍질이 딱딱하다. 그렇잖아도 가장 작았는데 조금은 더 작아진 것 같기도 하다. 수분이 빠져나가 얇아질대로 얇아진 껍질은 알맹이와 한 몸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속살은 말랑하니 그대로다. 속살이 한데 떼어나오지 않게 하려니 껍질 까기가 수월하지 않다.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벗겨낸다. 하얀 섬유질(귤락)도 마르지않았다. 귤락에 더 몸에 좋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나는 호두보다 조금 큰 귤 하나를 까기위해 애를 썼다. 다 까고보니 한입거리다. 귤의 속살(귤홍)은 주홍빛으로 여전히 탱글했고 달았다. 본연의 신맛도 감도는 것이 반갑다. 아마 2주 전이었다면 덜 달았을지도 모른다. 귤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고 마른 껍질에 갇혀 외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귤은 제주도의 지인이 보내 준 것이다. 농약을 치지않고 키웠다고 했다. 크기도 들쑥날쑥인데다 말쑥하지 않다고 했는데 받고나니 들은 바 그대로여서 오히려 좋았다. 작은 귤 하나로 목을 축였다. 귤이 지켜온 생명력으로 나는 또 살아있음을 느낀다.
물 한방울 축이지 못한 채 2주동안 사막을 헤매다 이 귤을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모래 폭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신기루에 홀려가며 무작정 걷다가 이 귤 하나를 발견했다면 이토록 태연자약하게 껍질을 깔 수 있었을까? 만약 2주전 수통이 비지않았을 때 귤 하나가 내 품 안에 있었다면 무심히 내버려 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건 작열하는 태양이 내 몸뚱아리에서 수분은 증발시켰을테고 한 밤의 추위에 더 오그라들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게하는 모래 폭풍속을 헤메느라 옷은 헤어지고 신기루에 홀려 헛된 희망을 품고 걷고 또 걷다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그렇게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껍질이 말라버린 귤과 같았을 것이다. 눈 앞에 실재하는 귤이 생명이 되고 오아시스로 인도하는 실날같은 희망일 수 있는 이유다.
내 눈 앞에 2주동안 귤이 있었고 그 귤은 제주도에서 지인이 농약을 치지 않고 길렀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누군가 귤을 바꿔치기 해서 그 귤이 2주 전의 귤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곳에서 재배됐는지도 모르고 지인이 직접 재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농약을 치지않았다지만 한번 정도 쳤을 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먹은 귤은 진실이다. 썩지않고 말라가면서도 속살을 지켰으며 시거나 달콤한 맛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나를 갈증에서 해방시켰다. 무심하게 버렸거나 살갗을 벗기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까야하는 수고로움을 외면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막에 뒹굴고 있던 귤이라면 말이다.
언론과 각종 매체가 사실이라는 혹은 사실로 이름 붙여진 거센 모래 폭풍으로 주저앉히려 하고 매번 다른 신기루로 현혹해서 방향을 잃게하는 사막을 걷는 것 같다. 오락가락하는 사법체계가 고장난 나침반처럼 믿을 수 없게 된 지는 오래다. 진실이 마른 귤처럼 나뒹군다. 그렇다고 영원히 사막에 갇혀 살 수는 없다. 사막은 오아시스를 품고 있어 아름답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작고 마른 귤 하나도 허투로 지나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비가 내리지 않고 건조해서 귤이 썩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한다. 딱딱한 껍질을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까야한다. 그래서 마침내 진실의 속살이 드러나게 하고 목을 축이는 것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할 힘을 얻는다. 믿을 수 없는 나침반만 자꾸 들여다보려 해서는 안된다. 그로써 실망하고 좌절한다면 이제껏 걸어왔던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하는 짓이다. 사막을 달구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만큼 틀림없는 나침반은 없다. 차가운 사막의 밤이 별자리를 더욱 뚜렷하게 해주지 않는가. 견디고 버텨야한다. 설사 밤을 지키던 모닥불이 꺼진다해도 진실의 생명력만큼은 꺼뜨릴 수 없는 것처럼...
" 진실의 생명은 확인하고 넘어뜨리고 부수고 깨뜨려도, 또는 그럴수록 더 확실해지는 데 있다. 나는 매일 진실을 꼭 껴안고 잤으면 좋겠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p464 / 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