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떨어지는 일은 없다. 목욕을 좋아한다.
퇴근을 하면 반신욕을 하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게 일과가 된 지 오래다. 아내는 급탕비가 많이 나온다고도 하고, 너무 늦은 시간 물 받는 소리가 다른 집에 들릴까 신경 쓰인다고 타박할 때도 있다. 하지만 유체이탈을 체험하듯 아득해지고 몸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미세먼지까지 밀려나오는 개운함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피부가 숨을 쉰다는 과학을 용출수처럼 흘러내리는 땀으로 증명하면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는 희열 그 자체다.
날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줘야한다. 냉동칸에서 꺼낸 도토리를 반으로 쪼개 베란다로 나간다. 아내는 속옷바람으로 베란다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우려가 아닌가 싶다. 두 녀석 모두 새끼때부터 길렀는데 땅콩이는 틈만 나면 케이지를 탈출해 내 몸을 타고 놀기를 좋아하는데 호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즘들어 호두도 도토리 주는 손바닥위에서 까먹는 걸 즐긴다. 작은 생명체가 손바닥에서 꼬물거리는 광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형편에 과하다싶고 경제사정도 예전같지않아 그동안 타고 다니던 내 차를 팔았다. 필요할 때면 아내의 차를 이용하는데 오히려 아파트주차장에 세워져있을 때가 많다. 버스에 맛을 들이니 출퇴근시간에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고, 느닷없이 날아드는 범칙금 고지서에 화낼 일이 줄었다. 앱을 이용해도 몇 분 간격으로 틀린 버스 도착시간 때문에 눈앞에서 놓치는 일이 무덤덤해졌지만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오거나 마침 건널목에서 보행신호가 떨어져 버스가 나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면 쾌재를 부른다.
아직 아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텐데 결혼해서 지금까지 우리 부부가 누구에게 돈을 꾸어야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자식 둘이 대학을 다니고 아내도 늦은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고맙게도 큰 아이는 제 학비와 용돈을 알바로 해결하고 작은 아이는 돈이 거의 들지않게 학교를 갔다. 형편에 맞춰 살았고 궁할 때면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그래도 괜찮은 삶이다. 상속세가 33%에 이른다는데 그마저 한국 상위3%, 500억 이상인 경우라니 물려 줄 재산이 없는 나는 아이들의 상속세납부 걱정마저 덜어줬다. 이걸 자랑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중이다.
아내와 차로 이동하게 되면 대부분은 운전을 질색하는 나 대신 아내가 운전석에 앉는다. 간혹 내가 운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차가 어려운 지역이거나 꽤 먼 거리를 후진해야 할 때다. 오른팔을 조수석에 걸치고 한손으로 후진을 할 때 아직도 아내는 경탄과 함께 아이돌을 대한 소녀의 눈길을 보낸다. 가끔은 박수를 치며 멋있다고 한다. 머쓱하지만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작은 것에 감동하는 삶은 멋지고 행복하다. 있어서 불편한 것보다 없어서 아쉬운게 나을 때가 많다는 걸 느끼며 산다. 아직도 한참 덜어내야 할 것들이 많다. 허세, 허위, 허례에서부터 짐이 되거나 필요가 다한 물건들, 그리고 사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고, 조금씩 실천하는 중이다.
얼마전 블랙홀을 찍은 사진이 화제였다.
인류가 빛마저 삼키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는데 걸린 시간과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5500만광년이라는 가늠하기 어려운 먼 시간을 건너왔음을 생각하면 한 인간의 소멸이 찰나(刹那)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소름끼친다. 아주 멀리서 본다면 이틀을 사는 하루살이와 100년을 사는 인간은 사실 별다를 게 없다.
더 높고, 많는 것을 가지려면 정작 귀하고 소중한 것을 괴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닿지도 못할 창공으로 바벨탑을 쌓느니 발 밑에 핀 풀 한포기를 살피는 심정으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