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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Jan 07. 2021

우리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묘하게도 생겼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를 축소한 것만 같은 조그만한 술잔이다. 제 혼자 서 있질 못하니 짝으로 들어있는 고리모양 받침대에 올려놓지 않으면 담긴 술이 쏟아지게 되어있다. 술잔을 채웠으면 단번에 비우라는 무언의 암시가 느껴진다.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중화사상이 별건가. 술자리 문화마저 전파하려는 음흉함이 능글맞다. 이 술잔은 선물받은 수정방에 셋트로 담겨있던 것이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두주불사도 많이 봤고 인사불성도 경험했지만 그는 발군이었다.
양주 두 병을 비운터라 음주운전을 만류했지만 그는 운전하려고 그정도만 마신거라며 한사코 운전대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코너를 돌자마자 음주 단속이다. 뒤따르던 나는 노심초사한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차창문을 열어 음주측정을 받고 이내 통과 한다.
기가 막혔다. 주량은 체적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다. 그는 백 키로를 훨씬 넘는 거구에다 함께 한 4년 반동안 취해서 먼저 쓰러지는 걸 보지 못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는 술자리에 술값이 부족해 은행 대출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마지막 직장에서 모셨던 사장이다.

술에 관한한 장비나 다름없었던 그조차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다.
당시 중국과의 사업은 지뢰밭 건너듯 조심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을 때였다. 그 중 첫 관문은 술자리였다. 중국 사람과의 건배(乾杯)는 글자 그대로 잔을 비우는 원샷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귀한 손님 왔다고 돌아가며 술을 따르는데 그 잔을 다 받다보니 취기도 오르려니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끓는 물에 살풋 데친 무당개구리 안주는 이제 문제거리도 안된다.
그가 구원을 청하듯 나를 쳐다본다. 찡긋거리며 살짝 턱을 치켜들며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 나는 맥주를 들여오라 일렀다. 그리고 통역에게 "한국에서는 이렇게 마십니다. 오늘같이 좋은 자리에 선을 보이고 싶습니다." 라는 내 말을 전하게 했다.  "하오..하오~" 그리고 몇가지 현란한 솜씨를 선보이며 맥주에 독한 술을 말아 권한다.
그들도 생전 처음이겠지만 맥주에 고량주를 탄 폭탄주는 나 역시 처음이다. 두 세번 순배가 오가니 그 전까지 말짱하던 중국인들이 하루 둘 흐트러지고 정신을 잃는다. 곧 자리는 파하고 우리 일행은 개선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호텔로 입성했다. 한국산 폭탄주의 승리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는 우리 일행은 그 영빈관에서 장렬히는 커녕 초라하게 전사했을 것이다.
위대한 발명품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그 중에 폭탄주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술에 다른 음료를 첨가한다는 의미라면 서양의 칵테일도 있다.
기원을 정확히 따질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따뜻한 막걸리 한 사발에 증류식 소주 한 잔을 타서 맑게 위로 떠오른 술을 마셨다는 1837년《양주방》기록이 최초다. 이를 ‘혼돈주(混沌酒)’라 불렀다니 당시부터도 한국인의 작명 솜씨는 대단했던 것 같다.
세계 각국에도 우리의 폭탄주와 비슷한 술문화가 있다. 맥주하면 떠오르는 독일에서는 증류주에 양조주를 섞어 만드는 유보트라는 칵테일이 있고, 혹독한 추위와 유배지로 유명했던 시베리아에서는 노역수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보다 대중적인 서양의 폭탄주는 영국의 보일러 메이커(Boilermaker)다. 위스키에 맥주를 섞어마시는 게 우리나라와 흡사하다. 퇴근한 노동자들이 싼 값에 빨리 취하려고 시도한 칵테일이라고 한다.  
노역수나 노동자가 자신의 처한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거나 잊고 싶어서 마신 것을 보면 폭탄주는 서양에서도 상류계급의 술문화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만 하더라도 취업이 어렵지 않았다. 우리 동기들은 여러 회사로 흩어졌다.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됐을 무렵부터 술자리를 가졌는데 장소가 주로 서울역 부근이었다. 사대문 안 서울의 중심이어서도, 지방 근무자를 배려해서도 아니다. 근처에 한 대기업 본사가 있어서였다. 우리들 중 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제일 많았는데 출석율은 제일 떨어졌다. 그 회사 회장의 말마따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넘쳐나서 야근을 필수고 퇴근은 선택이어서 그랬다.
하는 수 없이 그 회사 근처에서 모임을 가지면 그나마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저녁 모임을 하고 있으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난 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맥주에 소주를 타는 것이었다. 친구가 보고 싶어 나오긴 했는데 곧 다시 야근하러 들어가야하니 단숨에 몇 잔 들이키기엔 폭탄주만한 것이 없어서였다.

노역수나 노동자 그리고 말단 사원이 궁여지책으로 말아 먹는 폭탄주에 불순한 의도가 더해지고 재료가 고급화되면 오히려 퇴폐스럽고 저질스러워진다.
편법과 청탁을 위한 접대성 술자리에서 폭탄주는 공범 의식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쓰여지고, 재료는 소주에서 위스키로 상향 조정된다.  정신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제대로 접대받은 것이 되고, 고급 위스키를 섞을 수록 귀하게 접대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젊은 날 우리나라에 있는 왠만한 위스키는 다 먹어봤다. 대부분이 브렌디드 스카치 위스키였는데 싱글몰트는 술을 끊다시피한 다음부터 위스키를 잘 아는 지인들의 권유로 가끔 마셔 봤다.

한국에 들어온 대중적인 위스키 중에 가장 고급스럽게 취급받고 비쌌던 브랜드가 발렌타인이었던 것 같다. 발렌타인은 유독 30년산이 아니면 선물하고도 좋은 소리를 못듣고, 마시면서도 흔쾌하지 않은 위스키가 아니었나 싶다. 그 발렌타인 30년산을 폭탄주로 말아먹은 적이 몇 번 있는데 기억에 남는 술자리는 두 번이다.
한번은 술버릇이 난잡한데다 취하면 안하무인이던 모 기업의 젊은 후계자와 술자리였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접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술자리를 엎어버렸다. 또 한번은 어려서부터 시작한 사채업으로 번듯한 회사를 갖게 된 사채업자와의 술자리였는데 장소가 강남 삼성동 유명 호텔 지하였다. 발렌타인 30년산이 100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위스키로 폭탄주로 말았다. 그것도 화채그릇에다 한병씩 통채로 부었다. 왠지 안쓰럽고 불쌍하게 느껴졌었다. 거기에서도 사건이 있었는데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한결같이 좋지 않은 기억이다.

맥주에 위스키를 섞는 원래의 폭탄주부터 소맥, 오십세주, 소백산맥, 뽕가리스웨트등 다양한 종류와 기교만큼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나라다.
하지만 술은 취하고 감정을 발산하기 위해 마시기보다 즐기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빛난다. 더구나 단숨에 다같이 죽자고 제조하는 폭탄주는 테러리스트의 사제폭탄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폭탄주는 아무리 무슨 수를 써서 발전 계승시킨다 하더라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리가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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