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Jan 08. 2021

서울의 눈

눈이 장하게도 내렸다.
이제 나는 눈더러 펑펑이라든지 포실포실이란 말을 쓰지 못한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서울에 내리는 눈은 솜털처럼 가볍지도 순백의 영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몇 년에 한번 그것도 시늉만 하다 그치는 눈이 고작인 남녁에서 자랐다.
내리는 눈을 원없이 본 건 군 입대해서 강원도에서 박박 기었을 때다. 연병장 한쪽 끝에서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너까래로 밀고 지나가면 등뒤로 조롱하듯 눈이 다시 소복히 쌓였다. 먼 산에 쌓인 눈은 장관인데, 무릎까지 차오른 눈은 애물단지였다.
어릴 때는 볼 수 없어 아쉽고 그립던 눈이 커서는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게 있어 서울의 눈은 빨간 옷을 입은 여배우가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던 어느 카드 회사의 광고 영상이다.
마음껏 카드를 긁을 수 있는 부자에겐 크리스마스때 찾아올 빨간 산타겠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쌓인 눈이 돌아올 카드빛이고 빨간 경고음이다.
거실 넓은 창으로 설경을 감상하는 사람은 푸근한 솜이불이지만, 집으로 난 오르막길이 미끄럽지는 않을까 수도가 얼지는 않을까 근심인 사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쌓인 눈을 보고 스키 장비를 챙기는 사람들이 있고, 내일 출근길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얀 눈과 도심의 먼지가 뒤섞여 진창으로 얼어붙은 거리를 내다 보고 있다.
눈이 내렸다.
멈춘 버스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서두르는 사람들의 원망서린 눈초리를 받는 눈이고, 고가 외제 승용차 안에서 히터를 켜 둔 사람은 연료 걱정을 하게 하는 눈이다.

딸이 가디 차를 세운다
야야 와그래 차 세우노
엄마 요앞에 더디 걷는
할매보이 엄마 생각이 나네
우리 엄마도 저래 걸어가겠지 싶어서
빵빵 거리도 못 하고
딸이 그 말을 하이
내 눈에 물이나네
- <시가 뭐꼬?> 강금연 (경북 칠곡군 할매들의 글을 엮은 책)

우리도 할매가 된 엄니의 젖을 물고 컸다. 이왕 쓸고 있는 김에 이웃집 앞도 쓸어 주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클락숀 울리기 전에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동동거릴 앞 사람을 먼저 생각하길 바란다. 우리 엄니고 이웃일테니까.
그렇게라도 우리끼리 보듬고 녹이며 살자.

작가의 이전글 골프 이야기 같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