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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06. 2021

화를 다스리며

내장사 대웅전이 불탔다. 3개월여 전에 내장사로 거처를 옮긴 수행승이 저지른 일이라 했다. 그는 다른 승려들과의 불화로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천년고찰이라지만 대웅전은 임진왜란과 6.25를 거치며 4번의 복원을 거듭한 건물이라는 것이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2008년에는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탔다. 자기 소유의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70대노인의 짓이었다.

제 속의 불을 밖으로 뿜어낸 것이고, 엄한 데서 발화한 불씨를 옮겨다 붙인 사건들이다.
그나마 이런 일들은 주목을 끌고 기사화되니 모두가 알게 될 뿐이고 우리 모두는 속에 불을 안고 산다.
원망, 분노, 증오라는 뜨거운 불과 심지어 상심, 절망 좌절이라는 차가운 불까지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건 이것은 ‘화’다.

흔히 ‘화를 다스린다’고 한다. 다시말해 누구나 ‘화’라는 불씨를 지니고 산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50년 면벽수행한 고승도, 간난아기에게도 부싯돌이건 라이터든 불을 댕길 것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분노라는 불씨에 발화되면 방화를 하기도 하고, 절망으로 지펴지면 자살을 하기도 한다.

불씨를 댕겼다고 매번 불길이 치솟는 것은 아니다. 콩알탄처럼 짧게 불꽃만 튀기다 금새 사라지기도 하고 산불처럼 온 초목을 다 태우고서야 꺼지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불조심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달리 나타나는 이유는 각자가 쌓아두고 있는 땔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는 마른 장작이고 또 다른 이는 숯으로 품고 있다. 혹은 항상 젖은 장작일 때도 있다. 숯이라면 은근하지만 뜨겁고 오래 갈 것이며 마른 장작이라면 불길로 치솟아 주변에 옮겨붙거나 화상을 입히고서야 제 풀에 꺼질 것이다.
젖은 장작이 타기란 좀체 쉽지않다. 하지만 한번 타기 시작하면 스스로 말라가면서 옮겨붙는다. 방심하고 있던터라 오히려 피해는 더 클 수도 있다. 점잖고 순한 심성이거나 종교나 교육으로 잘 적셔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불이, 화가 사람 속에 들어있으니 문제다.  살아있어 체온만으로도 늘 마르고 있는 중이고 심장 근처에 있으니 화산 분화구 주변처럼 늘 뜨겁다. ‘홧병’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용암이 속 안을 까맣게 태우고 있어 생기는 병의 다른 이름이다.

내장사 화재는 한 승려가 제 속의 화를 못다스리고 술이라는 인화물질을 부어 저지른 방화사건이다.
인간은 모여 산다. 그러니 남이 일으킨 불에도 옮겨 붙기 십상이다. 내장사 화재 사건으로 화가 치밀었다면 이미 불길이 번진 것이다.
설사 멀리 떨어져 산다해도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더많은 끈으로 엮어놨으니 선사시대보다 더 가깝게 살고 있는게 분명하다.
머나먼 타국에서 일어난 불일지언정 금새 내 안에 불똥을 튀긴다. 태평양 건너 미국이건. 홍콩, 미얀마에서건 일어난 불길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디건 사람사는 세상이라서 그렇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사방팔방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불꽃이 튀고 있다.
내 속에 라이터가 있는지 부싯돌이 있는지 챙겨 볼 것이다. 쌓고 있는 것이 마른 장작인지 숯인지 알아야 대처를 하기가 쉽다. 자기 속을 들여다 봐야하는 이유다.
불행히도 내 속의 불길이 겉으로 드러나면 가장 먼저 화상을 입는 이는 가까운 가족을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이고, 손에 닿는 것들이다.  
신경질, 짜증, 거친 말투와 예민한 반응. 거기에 알코올이라는 인화물질을 꺼얹으면 주사라는 몹쓸 짓을 동반하기도 한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은 내 것이 먼저다.

내 속에도 불이 있다. 부싯돌이었으면 좋겠고 숯정도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극악하거나 절망적인 사건, 부당하고 부정부패한 세상사를 접하면 긴 날숨 한번 내쉬고 뜸을 들이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일부러 내 안의 불씨와 땔감을 멀찍히 떼어놓으려 하고, 닫힌 이궁이 통풍구를 활짝 열어제끼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젊은 시절 내 속에는 강력한 토치가 들어있었고 언제든 쉬이 불붙을 수 있는 마른 삭정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성정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텐데 누군가에게서 변했다는 얘기를 듣게되면 나는 풍선을 예로 든다.
“늘 내 속에 풍선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로 부풀어 오르는 건 어떨 수 없고, 꼭히 그렇지 않더라도 심장은 식지않았으니 조금씩은 팽창하고 있죠.
갑자기 터지지 않게 날카로운 것은 멀리 하려고 하고, 너무 부풀어 터지지 않게 풍선 주둥이를 조금씩 열어 바람을 빼며 삽니다.
그렇게 손에 쥔 풍선 주둥이를 놓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죠. 놓치는 순간 순식간에 화를 내뿜으며 미친듯 허공을 휘저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금새 초라하게 쪼그라들고 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본 결과이고 오랜 세월이 걸려서야 깨달은 경험에서 우러난 나름의 생존 방법이다.

그런데 참으로 고약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불순한 이익만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의 땔감에 끊임없이 라이터 불을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인화물질을 끊임없이 들이붓기도 하는 방화범이 그들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공존하며 살고있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36.5도의 체온을 유지하면서 언제 옮겨붙을 지 모르는 불씨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주 자기 속을 들여다 봐야 한다. 자신을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에 이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가치든 이념이든 혹은 닿을 수 없는 이상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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