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Mar 16. 2021

만년필을 깎다가..

나는 만년필을 쓴다. 처음 갖게 된 만년필은 고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쓰시던 것이었다. 중국제 '영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후드팁(펜촉이 덮혀있는 형태)이 왠지 고급스러웠다. 이후로 파일롯트, 파커 등을 내 돈으로 사서 쓰기 시작했다.

만년필을 안썼던 시기가 있었는데 군복무 시절이었다. 파손이나 분실우려도 컸을 뿐더러 갱지와 먹지를 대고 카피본을 썼기에 그리 효율적인 필기구같지 않았다. 갱지는 닙(펜촉)에 이물질이 끼여서 안좋고, 먹지를 쓰게되면 눌러써야 하니 또한 닙이 벌어지거나 틀어지기 일쑤다. 말하자면 종이도 가리지만 사용자의 필기습관도 따지는 필기구가 만년필인 것이다. 게다가 보고서류는 타자기를 썼다.
웬만해서는 볼펜을 쓰지않는데 주된 이유는 볼펜똥과 필기감 때문이었다. 이후 개량된 볼펜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손에 익지 않는데 아무래도 종이위를 종횡무진 굴러다니는듯한 느낌이 나와 맞지 않아서다.

글씨를 꽤 잘 쓰는 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특활시간에 잠시 서예를 했기도 하지만 언제나 받아쓰기 시간에 칭찬받는 아이중에 한명이었다. 그러다 중 고교시절 주로 볼펜을 쓰게되면서 필체가 좀 망가졌다. 쓰면서 외우느라, 바삐 옮겨 적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한다.(설계도 결국은 그림이다.) 뭐든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라 CAD 보다는 드로잉으로 구상하고, 워드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쓰는 것이 빠르고 편하다. 오구(까마귀 주둥이라는 뜻의 필기구)라고 하는 유물이 된 지 오래된 제도기구를  일부러 찾아 써 본 동세대의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루고 쓰기가 불편한 필기구다.

연필도 좋아한다. 샤프보다는 연필을 좋아하고 샤프를 써야 할 때도 1 mm 이상의 굵은 심을 고집한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패스츄리를 베어 물 때의 아삭하는 소리만큼 감미롭다.
무엇보다 연필을 깎을 때 잠시 무념무상에 빠지는 느낌을 사랑하는데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깎여나간 나무조각에서 살풋 풍기는 향기는 어느 아로마향에 비할 게 아니다. 식장에 들어서기 전 옷 매무새를 매만지는 일종의 의식같기도 하다.

스마트폰의 스케쥴앱대신 다이어리를 쓰고, 작은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필체에는 사람이 드러난다. 성격과 기운을 알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추사체와 왕희지체를 대할 때 만나보지 못한 그 분들을 알 것만 같다. 난중일기의 필체에는 이순신의 곧고 날카로우며 예민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심지어 전장에서의 평온하지 못한 다급함도 읽힌다.

만년필과 연필은 잠시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만년필은 그 이름처럼 촉이 다 닳을 때까지 잉크를 물고있다가 뱉어내고. 연필은 제 몸이 깎여가며 몽땅연필이 되어서까지 제 역할을 다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그리 사랑받지 못한다.
첫째는 번거러워서다. 잉크를 주입해야 하고 깎고 다듬어야 한다.
둘째는 관리가 용이하지 않다. 뚜껑을 열고 닫고 심이 노출되어 있어 심이 부러지기 일쑤다.
세째는 편리하지가 않다. 일정한 각도와 방향을 맞춰야 써지고 닳아서 뭉툭해진다.
한마디로 손이 많이 가는데다 신경쓰이고 사용하기에 까다롭다.

무릇 좋은 것은 친절하지 않다. 약이 되는 말은 쓰다. 옳은 일은 힘들다.
미인은 대체로 까탈스러워서 얻기란 힘들고, 진심어린 충고는 불화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옛 선조들은 상소문에 자신의 목과 가족의 안위를 걸어야만 했다.
세상에 널리 퍼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기만이고 사기다. '편한 게 장땡이다'란 말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선동이고 그릇된 유혹이다.
만년필이 내 손가락 끝 융기에서 팔과 가슴, 머리로 전해주는 짜릿한 교훈이다.
매끄럽게 써나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필기각을 유지해하는 원칙, 비틀거나 거꾸로해서는 잉크를 뱉어내지 않는 고집스러움, 종이와 필압을 가리는 까탈스러움.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쓰는 이의 습관과 정성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충성심, 찌꺼기와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깔끔한 매무새처럼 정갈하고 고고한 자세, 아무데서나 몸을 굴리지도 압력에 굴하지 않는 올곧은 소신으로 보답한다.

세어보니 만년필이 열 세개쯤이 있다. 3~4만원대부터 150만원에 달하는 고가품도 있다. 가장 비싼 만년필은 오래전 큰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큰 맘 먹고 구입한 것이다. 그 밖에는 디자인과 실용성을 감안한 중저가의 제품들이다.
요즘은 1만원대의 쓸만한 만년필도 쏟아져 나온다. 나는 카트리지 교환방식은 쓰지않는다. 카트리지를 쓰고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환경오염도 오염이지만 만년필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 아쉽게도 피스톤방식의 만년필은 일반적으로 카트리지 방식보다 조금 비싼 편이다. 프린터회사들이 본체는 싸게 내놓고 잉크는 비싸게 공급하는 이치다. 소비자의 얄팍한 심리를 파고 든 마켓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가 가장 자주 쓰는 만년필은 대만제 '트위스비 에코'와 '라미 2000'이라는 제품이다. 반영구적인 피스톤 방식인데다 가성비도 뛰어나다. 트위스비는 4~5만원대이고 라미 2000은 17~20만원대다. 라미 2000은 가격때문에 망설이다가 드물게보는 후드타입인데다 역사(1966년부터 생산)와 무엇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요즘은 일회용 카트리지 대신 컨버터를 끼워 쓸 수 있으니 사용 후기를 보고 마음에 드는 비교적 저렴한 만년필을 구입해서 쓰기를 권한다. 고가의 만년필은 만류한다. 사람도 제 그릇이나 인간 됨됨이(만년필로 치자면 펜촉)을 뛰어넘는 자리와 권력을(몸체의 보석이나 장식) 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현실에서 자주 보고 있지않은가.
부디 많은 사람이 만년필과 연필이 전하는 교훈과 진심을 느끼고 알아가게 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