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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25. 2021

뿌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말문이 트이는 것보다는 말 귀를 알아듣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말귀를 알아듣는 게 더 오래 걸렸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아이들이 제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하더라도 어른들은 낯선 단어 하나정도만 섞여있어도 신기해하고 기특해한다. 쉬운 둣 어려운 게 남의 말을 알아들어 생각을 읽고 그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게 중요하다. 인기있는 연예인의 재치있는 말솜씨에 한바탕 웃고 말 뿐이지 오랫동안 되새김질하지 않는 이유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 말인데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생각의 힘’은 그토록 놀랍다. 역사는 보폭과 속도는 다를지언정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과학은 인과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선후관계와 상관관계까지 아우르는 경향이 있다. 선후관계는 우연이 개입한다. 그래서 다시 증명할 수 없으니 과학이 아니다. 상관관계는 그 밖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수학은 틀림없다거나 정답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실은 다른 학문처럼 진리에 접근하는 과정이고 자연계에서 관측되지않는 개념까지 이론을 일반화하거나 추상화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오해나 몰이해는 일상에서도 숱하게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말과 말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점에서 불꽃이 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냉소주의와 회의주의가 그러하고 비판과 비난이 그러하다. 어떤 경우에는 단어의 사전적 뜻풀이보다는 의미나 뉘앙스가 중요할 때가 있다.
냉소주의에는 과거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미래나 희망이 거세되어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회의주의는 과거에 대한 복기를 통해 미래를 지향하거나 일말의 희망을 갈구하는 자성이 담겨있다. “그래봤자”와 “과연 그런가”는 분명 다른 말이다.

냉소주의자는 비난을 하고 회의주의자는 비판을 한다. 합리성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냉소는 처벌에 방점이 찍혀있고 회의는 증명하고자 한다. 비록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의도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는 천양지차다.
주류 언론이나 일부 인플루언서들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 중에 최악은 냉소주의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비난은 부정을 전제로 하고 합리성이 배제되어있어 언제든 상대를 바꾸거나 번복한다. 비판은 분석을 전제로 하고 지적하고자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냉소주의와 비난은 얕다. 회의주의와 비판은 그보다 깊어야 할 수 있다. 즉 반응하느냐 생각하느냐의 차이다. 얕고 가벼운 것은 쉬우나 버려지기 마련이고 깊고 무거운 것은 잘 쓸려나가지 않는다. 인류문화의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만한 부분은 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말은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악에 개입했거나 그 죄악 자체다.

우리는 말이 소통에 기여하기보다 인간 사이의 단절을 부추키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부딪치고 깨진 말들이 흘러가는 하류에 쌓일 말의 쓰레기는 어떤 사람들이 쏟아낸 무슨 종류의 오물일지를 따져봐야 한다.
머리를 거쳐 마음에 도달하거나  마음으로 스며 머리에서 정제된 말은 사람을 움직인다. 머리속에서만 한바퀴 돌아 입으로 뱉어낸 말은 그럴싸해 보일 뿐이다. 혹세무민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말이 화려하지만 울림이 없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깊이고 뿌리다. 맨 손으로 헤집든 누군가의 힘을 빌리던 쟁점의 근저에 다가갈 시도조차 않는다면 말을 삼가하는 것이 옳다.
말 많은 세상이라고 해서 말 잘하는 인생이 아름답지는 않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역사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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