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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pr 04. 2021

프로포즈와 쓴 맛

“나 장가가야 하니까 시집 좀 오이소. 지금 귀싸대기 때려도 할 수 없지만 나 장가가야 합니다.”
그녀는 오후 강의를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다급하게 뛰어온 한 사내가 건넸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더구나 같은 과 동기인 그와는 겨우 안면을 텄을 뿐이지 연애는 커녕 말도 몇차례 나눠보지 않은 사이가 아닌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시집을 오라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가 막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 죄송합니다. 가던 길 가세요”

대학생 신분이 아니었다면 길거리 부랑자라해도 이상할 게 없었던 그와 부부로 인연을 맺고 42년을 살았다.
그는 건달이었다. 진정한 건달이 되고 싶고 건달이기를 자처한 사람 채현국 그리고 범상찮은 그의 삶을 지탱해준 아내 윤병희 교수의 만남은 그러했다.

그는 평생 잘한게 별로 없는데 그녀에게 장가 든 게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윤교수는 수줍게 웃으며 “잘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흔도 되기전에 자신이 일군 국내 굴지의 기업을 하루 아침에 정리해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등처가의 길로 들어선 남편이다. 곁불도 쬐지않고 곁길로 새지않으며 올곧게 한길로만 걸은 사람.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 오척 거인 채현국 선생이 4월 2일 영면하셨다. 돌올한 인물이 떠나셨다.
오늘 아침을 먹고 난 후 지금까지 그의 인터뷰 기사와, 영상 그리고 그에 관해 썼던 나의 이전 글과 평전이라고 할만한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온전히 그를 추억하고 새기는 날로 삼기로 했다. 이것은 존경하는 분을 추모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다행히 적지 않은 자료가 남아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인물 검색이나 기사 한편 훑어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의 금과옥조 같은 명언들과 생각, 지난 행적을 따라가보면 좋겠다.

그는 인생에 관해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정말 남 기죽이거나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 그것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하지”라고 했다. 말씀은 그리 하셨어도 당신은 적어도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다 가셨다.
산파적인 직업을 넘어 세상의 산파로 살다 간 우리 시대의 큰 어른 채현국. 그가 마지막까지 애정을 기울였던 학교의 돌에 새겨진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야겠다. 그래서 조금은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그를 기억하는 남은 사람의 도리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 죽음이 불안과 공포라는데, 사는 것 자체가 불안과 공포 아니요? 죽음이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쉰다는 것이죠. 하긴 게으르게 산 사람도 좀 쉬어야지. 순환, 뭐 그런 게 아니라도 죽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니까. 나이 많은 사람에겐 빨리 못 갈까봐 걱정이죠."
이제 바삐 걷던 잰 걸음 멈추시고 편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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