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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pr 13. 2021

광풍에서 살아남기

놀랍다. 사람들간의 거리는 멀어지는데 서로의 얘기는 더 또렷하고 가깝게 들린다.
텍스트로 부족해서인지 이제는 음성으로 수다를 떨 수도 있다. 사람들마다 손 안에 무전기 하나씩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니 그렇다. 주파수만 맞추면 세계 어느 곳의 소식이든 누구의 얘기든 들을 수 있다.

그에 더해 반갑고 두려운 사실들이 있다. 그들이 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이웃부터 외국 정상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언론에서 다루지않는 분야까지  쉽사리 접할 수 없는 각 방면의 전문가를 수시로 만나고 견해를 들을 수 있다.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재야의 고수들이 쉼없이 출현하고 백가쟁명한다. 난세라더니 춘추전국시대의 재림을 방불케한다.

이제 놀라움은 당연시되고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루는 주제의 금역이 사라졌다. 자신을 떠받드는 지위나 학벌, 나이가 무용지물인 세계이고보니 민낯이 드러나고 밑천이 보인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수준 높은 주장을 펴더라도 사람들은 작은 티끌 하나도 지나치는 법이 없다. 주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 예리하고 어김없는데다 글로벌하기까지 하다. 자칫 속없이 뱉은 흰소리 한번이면 구덩이가 패일 때까지 집중포화가 날아든다.

스스로 되뇌이는 말이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자연현상 중에 토네이도란게 있더라. 영화에서만 봤지만 사람은 물론 트럭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하던데 자주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 삶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토네이도를 쫓는 사람들이 있는데 스톰 체이서(Storm chaser)라고 부른다.
나는 스톰체이서가 아니다. 주민인 것만은 분명하고 내가 접하고 교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민이다. 가끔 스톰체이서를 자임하는 일반인들을 보게된다. 일기예보에 주목하고 등교한 아이들을 피신시키기보다 토네이도를 향해 차를 모는 사람들이다. 경륜이나 전문지식도 얕으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싶어한다.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토네이도는 빈번하게 출몰한다. 온갖 이슈와 뉴스거리가 돌풍을 일으키고 그 세기에 따라 일상마저 날려버리기 일쑤다. 좀더 가까이 목격하고 유명세를 타려고 다가가는 만큼 위험은 커지고 그 최후는 영화에서처럼 해피 엔딩이 아니다.

누구나 관심있는 분야가 있고 남보다 더 아는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란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각자의 눈높이 만큼이고 시야의 너비 안이다. 그런데 가끔 자기 생각이 금과옥조이고 진리인양 착각하는 사람을 만난다. 재야의 고수라고 했지 유아독존의 성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버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주로 자기 영역에서 나름의 명성과 자격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전문가 그룹에서 그 양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자, 변호사, 의사, 교수, 학자등이다. 일반인 중에도 학벌이나 지위를 병풍으로 삼거나 남다른 식견을 일부 집단에서 인정받는 인플루언서에게서도 관찰되는 경향이다.

그런데 전문가 그룹은 대체로 이기적이거나 기만적이다. 자신이나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는 사회적 공감이나 윤리를 저버린다.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그 어떤 조짐과도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에두르고 갖은 논리로 대중을 설득하려 든다.
주목받는 일반인 인플루언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처한 상황, 형편에 따라 이전의 보편타당해 보이던 논지와는 다른 주장을 스스럼없이 펼친다. 정치적 성향, 출신 지역, 직업, 학력 심지어 사는 나라나 지역, 부동산의 유무에 따라 수시로 입장을 바꾼다. 일견 당연해보이지만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중들이 눈치채지 못할만큼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언설을 구사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라서다.

거기에 더해 세상의 조류에 편승해 주목받고 세를 확장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장돌뱅이 디지털 노마드도 등장했다.
전문영역에서 출발했지만 차츰 다양한 영역., 건드리지 않는 이슈가 없다. 대중은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신도로 전락한다. 자기 주장은 강력하게 설파하면서 반론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사이비종교가 대개 그렇다. 인민재판에 버금가는 공개비난도 서슴지않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그렇게 이름을 알리면 지면에 컬럼을 싣거나 독자적인 미디어 매체를 만들어 입지를 굳힌다.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자들이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고 밥을 먹다가도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댄다. 방송 편성에 의한 뉴스보다 더 빠르게 일반인들에 의해 세상 소식이 전해진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그리고 스마트폰의 위력은 실로 다양한 영역에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이제 스마트 폰은 카메라 성능으로 우열을 다툰다. 나중에는 스마트 폰의 뒷면이 거미눈처럼 렌즈로 뒤덮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앵글 안의 걸리적거리는 물체를 임의로 지울 수도 있다. 당겨찍고 넓게도 찍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성능이 좋아진대도 확대는 선명해질지언정 구도 안에 잡히지 않은 화면은 어쩔 도리가 없다. 세상사에 있어 확대는 전문영역이다. 나같은 범인은 좀더 넓게 주변을 담는게 낫다. 차라리 망원렌즈보다 광각렌즈가 주효하다. 확대와 왜곡은 레거시 미디어의 장기다. 그들이 하나의 초점 한 방향에서만 찍어 주목시키려고 발버둥칠수록 전체를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체 그림을 보려는 노력은 오판을 줄인다. 그들이 응달의 채 녹지않은 눈을 확대해서 보여줄 때 전경을 찍어보면 산 전체에 깃드는 봄이 보인다.
구석구석 보고싶고 알고싶다면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들 각자가 찍은 여러 컷의 사진을 펼쳐놓고 보는 것이다. 지우거나 조작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섣불리 내가 찍은 전경을 확대한 흐릿한 화면으로 판단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그들의 렌즈가 우수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자신만의 앵글과 해석을 하지않으면 언제든 휘둘리고 휘청거리는 디지털 세상이다.
인터넷과 SNS 돌풍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작 고맙고 참된 이웃은 자신의 집 지하실을 피난처로 제공하고 학교로 달려가 아이들을 대피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찍이 선출된 적이 없는 보안관이고 주민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지만 지켜만 보던 과묵한 주민이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농장을 다시 일구고 매번 부서진 집을 수선하면서도 고향을 지키는 그들이 결국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고 최후의 승자다. 그들은 알면서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목청을 돋우기보다 조용히 움직인다. 부화뇌동하고 조변석개하는 일단의 무리들에 에워싸여 스스로 교주화의 길을 걷는 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집안에 큰 거울을 들여다놓고 항상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자신의 깜냥과 한계를 인지하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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