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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pr 16. 2021

향수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는 일흔의 회장을 안다. 나이보다 10년은 젊어보인다.
함께 가야 할 데가 있어 조수석에 앉는데 좋은 향이 난다. 포마드나 스킨 향은 아니다.
“회장님 향수 쓰시나 봅니다."
”이제 내 나이가 되면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암만 샤워를 해도 안지워지죠. 향수를 써야지” 항상 존대를 한다.
“늘 젊으신데요. 뭘”
“요즘 만나는 회사 중역들이 전부 사오십대인데 그 사람들이 늙은 영감하고 사업하고 싶겠습니까 신경 바짝 쓰는 수 밖에..”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모았고 자식들도 뜻대로 키웠는데 앞으로 5년은 더 현역으로 뛰겠단다. 은퇴해서 머물려고 곤지암에 땅을 사둔지도 오래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정권….”
이후로 목적지에 가는 내내 거진 한시간 동안 쳐죽여도 시원찮을(표현 그대로를 빌리자면) 문재인 패거리과 여당을 비토한다.
자주 만나지도 않지만 만나면 곤혹스러운 게 이 정치와 노안이다. 그 연세에 현정권이 나라를 망쳐놨다는 신념이 바뀔 리 만무하다. 나로서는 들어만 주는 것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심한 노안으로 작은 글씨를 못읽는다는 것이다.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고 식단까지 조절해서 적절한 체중을 유지하는데 시력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나보다. 서류를 매번 읽어줘야 한다. 스마트폰 폰트는 최대로 확대되어 있다.

나이 들수록 뇌와 눈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노안도 결국 수정체의 탄력이 떨어져서 생긴다. 그러니 유연함을 잃는 것은 노화의 징조가 분명하다. 그런데 고정관념은 변하지 않거나 굳어진 생각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이다. 한번 어그러진 채 그대로 둬서 굳어버린 관절 같은 것이다.
회장은 팔을 뻗을 수 있는 만큼 뻗어 스카트폰의 문자를 본다. 좀더 멀찌감치 두면 볼 수 있는 것처럼 생각도 좀 떨어져서 하면 될텐데 못하고 안한다. 경주마처럼 좌우를 가리는 눈가리개를 하고 돈을 쫓아 달리기만 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한다.
시야의 좌우가 좁아들면 녹내장의 징후다. 점점 좁혀지다 마침내 안보이게 된다.

쉰을 넘긴지 오래다. 문학작품에서 ‘서른’과 ‘마흔’은 자주 언급하는데 ‘쉰’은 보기 힘들다. 그저 잠시 쉬어가는 시기여서 다루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작가 필립 로스(1933~2018)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쉰을 이렇게 말했다.
“ 쉰 살이 넘으면 자신을 자신에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들이 필요하지. 내가 수개월 전에 겪었던 것처럼.
갑자기 속수무책의 혼란에 빠져 그전에는 자명했던 것들, 이를테면 내가 하는 일을 왜 하는 건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왜 사는 건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는 왜 살고 있는 건지 더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니까.
내 책상은 무섭고 낯선 곳이 되었고 전에도 기존의 전략들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인 일상의 현실적인 일을 위한 것이건 글쓰기라는 특수한 문제를 위한 것인건- 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이와 유사한 순간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정력적으로 자기 쇄신의 결의를 굳혔지만, 이번엔 자신을 다시는 바꿀 수 없으리라 믿게 되었지.
자신을 새로 만들 수 있으리란 확신은 커녕, 무너져 가는 기분만 느꼈어. <사실들 / 필립 로스>”

마냥 느긋해 할 수 없는 쉰이다. 무너지는 내 자신을 추스려야 하고 거울 앞에 서길 두려워하지는 않아야 한다. 새로운 시도는 못하더라도 이전의 의미있고 가치로운 것들을 추려서 챙겨야겠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향해가는 지 점검하며 조심히 걸을 나이다. 향수 향은 아니더라도 사람냄새는 풍겨서 옆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아니 가끔은 향수를 뿌리는 것도 괜찮겠다. 기분이나마 새롭게하는 쉬운 방법이다.
그저 이대로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될 수는 없다. 필립 로스는 쉰 여덟에 이 글을 썼다. 몇 년 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느정도 해법을 찾았노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뇌와 눈의 유연성은 지켜야겠다.
가끔은 향수도 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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