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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11. 2021

빈센조 국

고교시절에 무협지 열풍이 불었었다. 반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읽었고, 교과서안에 겹쳐놓고 읽었다.
나는 두세 편을 마지막 권까지 읽은 이후로 읽지 않는다. 얼마전 무협지는 천편일률적인 플롯과 결말이더라라고 했다가 무협지광인 직원의 반론을 들었다.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현직의사인 한모라는 작가의 열광적인 팬인 그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그의 병원을 찾아갈 정도였다. 그의 예찬론에 수긍했다.
나 역시 빼놓지 않고 읽고 열광했던 연재 소설이 있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이었다.
절찬리에 종영된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최근에 <빈센조>를 뗐다. 무협지와 인간시장을 비벼놓은 느낌을 받았다. 그 인기에 힘입어서인지 비슷한 내용의 <모범택시>라는 드라마도 시청률이 만만치않다. 역시 몰아서 봤다. 현재도 방영중이다. <인간시장>역시 과거 드라마와 영화로 방영됐었다.

<인간시장>은 암울한 80년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 부정의를 법보다 가까운 주먹으로 응징하는 주인공의 통해 대리만족을 시켜줬다. 밑바닥 잡범부터 기득권층까지 넓게 포진한 악과 대결하는 장총찬은 홍길동의 현신이자 고담시의 베트맨이었다.
주먹세계 출신으로 법학도였던 장총찬을 2021년에 다시 불러냈으니 그가 빈센조다. 그는 입양아출신으로 이탈리아 마피아의 콘실리에리(상담역)인 변호사다. 장총찬은 행자승에게, 빈센조는 전직 GIS(이탈리아 특수부대) 출신에게서 배운 무술로 활약을 펼친다.
인간시장 이후 40년이 흘렀어도 세상의 악은 더 구조화되고 공고해졌으며, 사회에 드리워진 그늘은 더 깊고 어둡다. 장총찬이 빈센조로 환생한 이유다.

나는 80년대보다 지금이 더 두렵고 암울하다. 당시의 통제된 시대상 탓이었겠지만 인간시장에서의 악은 조폭이나 국제범죄단 , 비리정치인, 악덕기업주가 저질렀다.
그런데 21세기 빈센조에서는 장막에 가려졌던 악의 후위세력, 흉측하고 광폭한 오크들이 추종하는 샤우론의 정체를 여실히 까발린다. 국회, 관공서, 기업, 경찰, 검찰, 사법부까지 총망라된 마피아카르텔이 후위세력이고, 기득권을 놓치않으려는 특권층이 샤우론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심층적인 접근이다. 후위세력의 정점에 힘없고 가난한 시민이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검찰과 판사 그리고 변호사의 법피아가 있다.
21세기형 범죄는 그들에 의해 보호받으며 독버섯처럼 자라고 악인은 오크떼처럼 설친다. 죄를 밝히는 게 아니라 만들고 조작까지 서슴치 않는다. 죄의 경중을 따져 묻지 않고 죄인의 신분과 재산, 권력에 주목한다. 거기에 그들의 사리사욕이 일조한다.
그들은 국민이 아니라 조직과 자신을 위해서 복무한다. 극히 일부라고, 드라마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현실의 반영이란 말은 틀렸다는게 증명되길 바라지만 이 드라마 같은 현실은 한국땅에서 재현되고 지금도 방영중이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빈센조가 조씨인지, 조씨라면 본관이 창녕인지 함안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또 한 명의 조씨를 안다. 아니 이제는 그 가족사와 근황까지 온 국민이 알게 됐다. 나는 법적 판결이나 여론의 향방과 무관하고 지극히 상식적이며 양심에 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그 역시 법을 전공한 법학자이자 교수다. 대개의 상류층 혹은 기득권이 그러하듯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속한 계급의 이해를 위해 복무했다면 무탈했을 사람이다.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막고, 양심을 멀리하며 원칙보다 생존방식에 충실했다면, 어두운 구석에 눈 돌리지 않고 양지를 쫓았으면 가족이 찢어발겨지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주변에도 그를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부류는 그와 계급적 기반이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해서 동료라고 해야 어울릴 만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와는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의 대척점에 있는 정치권과 기득권은 교묘하게 당시 국면을 활용했고, 이미 한국사회에 만연한 계층 간의 위화감과 불신, 젊은 세대의 좌절에서 비롯된 분노를 분출시킬 타겟으로 그를 지목했다.
그런데 실상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에게 새기려는 주홍글씨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그들이야말로 마녀사냥에 나설 수 없는 진짜 마녀들이다. 짧지만은 않은 나의 삶과 경험이 그렇게 말한다.

또 다른 부류는 문제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특권이나 혜택(혹은 그렇게 보여지는)에서 소외된 소시민이거나 불공정에 민감한 젊은 세대다.
그와 그의 가족을 향한 검찰과 언론의 극악하고 집요한 응징은 마치 범죄집단이 그들 세계를 떠난 조직원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잔혹한 보복을 연상시킨다. 그 한국형 마피아가 조성한 분위기에 소시민과 젊은 세대가 조응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비난하는 이들 중에 사건의 본질을 파고들거나 이후 전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만약 분노가 진심이라면 마피아카르텔이 채운 눈가리개를 벗어 던지고 실존하는 구조적인 악과 사회적 부조리, 제도적 모순을 직시해야 마땅하다. 그토록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
그 정도의 분별력이나 의식도 없다면 게으르고 쉽게 흥분하는 한낱 무지렁이에 불과하다.

만화 같은 드라마에서의 빈센조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캐릭터다. 중원에 등장한 무림의 고수일 망정 총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현실 속의 조국이 고맙다. 자신과 가족에 씌워진 갖은 혐의와 비난에 대응할 힘을 가진 사람이어서다. 만약 그 모두가 부당한 것이라면 결코 굴복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담대함과 용기를 지닌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그로 인해 우리 사회를 장악한 마피아카르텔의 일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언유착의 실증적 사례가 됐으며, 검찰과 사법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게 됐고 그 단초를 제공했다.

그에게 닥친 불운은 일개 소시민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내할 수 없고 헤쳐 나갈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심정적으로 미안한 이유기도 하다.
역지사지는 어느 경우에나 적절한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만약 내가 그였더라도 현 입시제도에서 내 자식을 위해 주어진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주어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예견되는 가시밭길로는 선뜻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털어서 나는 먼지라면 그보다 자욱할 것이며 가족까지 제물이 된다면 진작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산산히 깨질 것만 같은 가족을 껴앉은 채 무수히 날아드는 총탄을 받아내는 그를 본다. 그가 조국이어서 다행이다. 이론을 겸비한 형법의 권위자이자 실천하는 교수였기에, 변호사를 쓸 정도의 재력과 우호세력이 있어서다. 지난 삶이 부끄럽거나 그리 큰 허물이 없는데다 남다른 강단을 보이는 인물이어서 안도한다.

현실세계에서 종횡무진 신출귀몰한 활약을 보이며 거악을 응징하는 악당 빈센조는 없다.
다만 빗발치는 총탄에도 허물어질 듯 허물어지지 않는 조국이라는 인물은 있다. 그가 구멍 뚫린 외투로 감싼 아내와 자식이 있고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는 우리가 있다.
나는 최소한 그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모두가 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한 사람임을 믿는다. 그가 버텨서 살인청부업자의 추악한 몰골이 드러났고, 누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하는 지 알게 됐다.
그는 지금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피아의 경계를 선명하게 긋고 있다. 단 한 발의 총탄에도 쓰러질 것이 분명한 나는 그를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꺼이 금가프라자의 주민이 될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모범택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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