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이 필요할 때

힐빌리의 노래 (2020)

by 문성훈

책을 읽건 영화를 보건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특히나 번역서나 외화가 그렇다.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거나 익숙치 않은 문화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나 민족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이나 관습, 제도가 나로 하여금 외국 여행중에 사게 되는 기성복이나 신발을 사는 느낌이 들게 한다. 치수의 단위가 틀릴 때도 있거니와 설사 같다 하더라도 동양인 체형과는 달라 볼이 좁고 긴 구두를 사게 되는 난감한 경우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읽든 보든 그 전후에 숙지할 사항이 많아진다. 때에 따라서는 등장인물이나 작가, 감독에 관한 정보까지 뒤져봐야하니 사전조사나 사후보충에 시간이 많이 드는 편이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2020)를 봤다. 윤여정이 극찬한 글렌 클로즈의 연기를 보고 싶기도 했다. J.D의 할머니 역을 맡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위험한 정사>(1987)에서였다. <미저리>(199)에서의 케시 베이츠 -그녀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글렌 크로즈보다 운이 좋다-와는 분명 다른 섬뜩한 광기였다. 미혼이었던 내게 외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고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감정에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영화다. 설사 여우조연상을 클렌 클로즈나 에이미 아담스가 탔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미국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은 외신에 자주 등장하는 러스트 벨트(Rust Belt)지역이다. 제목인 힐빌리(Hillbilly) 자체가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백인 하층민을 뜻하는 말이니 배경과 영화제목에서 개략적인 구도가 짐작된다. 말하자면 어려운 환경에서 역경을 딛고 성공한 J.D의 자전적 영화이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구성원 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나리’와 여러 면에서 비교될 만한 ‘가족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배움의 발견 / 타라 웨스트오버>를 한 장씩 넘기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배움의 발견'은 아이다호주가 배경이다. 유타주와 맞붙었는데 주도 솔트레이크 시티에 몰몬교의 본부가 있다.
타라는 몰몬교 근본주의자이자 정신병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이고 무력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7남매중 막내딸이다. 16살때까지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가 사회적 이질감과 정신적인 방황을 극복하고 박사학위를 따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을 담은 자서전이다.
잘사는 나라건 가난한 나라건 하층민은 존재한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그 경제적 격차는 현저하다. 그런데 잘사는 나라일수록 하층민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은 더 크다.

'힐빌리의 노래'의 J.D와 '배움의 발견'의 타라는 미국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하층민 가정의 자녀들이다. 그들이 어렵게 한발한발 딛고 올라간 사다리는 가파랐고 항상 흔들렸다.
‘가족 영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둔덕이고 벽난로 앞에 의자가 놓여진 안식처로 존재하는가. 아니다. 자기를 속박하는 굴레이고 평생 져야하는 짐일 수도 있다. J.D와 타라의 가족은 두 가지 양면성을 다 보여준다.
그들이 질척거리는 예견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힘이고 학위다. 유일한 사다리였고 그 앞으로 데려다 준 오빠와 할머니의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리에 찬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운 나머지 가족의 신산한 삶이 따라붙는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J.D는 테이블에 놓인 많은 포크와 나이프를 보고 어찌할 줄 몰라하고, 타라는 대학에 진학하고도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학자금 융자 받기를 꺼린다. 만찬에 초대받은 경험이 없었고, 세상과 격리된 환경에서 자란 탓이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의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고, 노력과 선택의 댓가는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한다고 믿고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도 저마다의 삶이 녹록하지도 않다.

책이 원작인 대부분의 영화에서 괴장과 축소 그리고 왜곡이 있게 마련이고, 평전과 자서전의 차이는 명백하게 다르다.
가령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는 실업 수당에 의존하는 빈곤층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던 민주당의 정책이 사실 허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는 J.D의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거세되어 있다.
게다가 백인 하층민의 분노는 흑인과 소수계를 향하기도 한다. -J D 주변인물중에 흑인은 등장하지 않으며 할머니는 동유럽계 이민자출신인 손자친구들을 대놓고 비하한다- 적어도 그들에 비해서는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배움의 발견>에서 타라가 늦게나마 배움의 길를 나설 수 있었던데는 성장과정에서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종교의 혜택을 입은 바 크다.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그녀를 받아 준 브리검 영대학은 유타주에 소재한 몰몬교인이 98%인 몰몬교재단의 학교이다. -밋 롬니가 나온 이 대학은 전미 4100여개 대학 중 60위권인 명문인데 무엇보다 최고 저렴한 학비로 유명하다- 그런데 몰몬교인은 비교인에 비해서도 학비가 절반이다. 다시말해 타라 가족의 가난한 살림에 브리검영대학 - 대학이름 자체가 교단을 이끈 회장의 이름에서 따왔다-이 아니었다면 입학조차 꿈꾸지 못했을 수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곡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빠알갛게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사바나의 장관 속에는 생존투쟁의 피비린내가 번진다.
미담이 미담으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는 불합리와 부조리로 직조된 세상과 개인으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불공정한 현실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눈에는 손자밖에 보이지않는 완고하지만 사랑 가득한 할머니의 시선과 어린 여동생에게 자신이 뚫고나온 가족과 종교라는 두터운 벽을 깨고 나오라는 오빠의 격려가 일종의 복음이었음은 분명하다

어느 사회든 줄탁동시로 자신을 에워싼 두터운 껍질을 깨고나온 용기있는 젊은이에게 안겨줄 수 있는 선물은 안전한 사다리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동참해야 할 숭고한 작업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넓고 편안한 계단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떤 집에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만큼 참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오르고 싶은 만큼 오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의마저 혼란스런 현 시대에 몇 남지않은 정의다운 정의다.

젊은이들의 인식과 가치관을 탓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는 자식이 사귀는 친구얘기에 친구 부모의 직업, 사는 곳은 어디며 몇 평인지를 더 궁금해 하는 부모는 아닌지, 소개받은 사람의 언행보다 그가 타고 온 차, 입은 옷 의 브랜드나 가방에 더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은연 중에 상대가 나온 학교나 직업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짚어봐야 한다.

과거에 놓여있던 사다리는 서둘러 걷어내면서 튼튼한 계단 놓기를 미루거나 외면하는 듯한, 차별을 혐오하면서도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차별적 사회에 이미 적응해버린듯한, 배금주의와 물신숭배라는 종교화된 신념에 물들어 그릇된 척도로 세상을 가늠하는 신도들이 많아지는듯한 한국의 현실 때문에 마냥 흐믓하게만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온전한 가족의 모습은 온전한 공동체 안에서만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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