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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14. 2021

늦지 않게

바쁜 순간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놓쳐서는 안될 기쁘고 소중한 순간을 대신 앗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군들 지나간 시간에 회한이 없을 수 있겠냐마는 나 역시 인생에서 가장 급박하고 치열했던 순간에 진정한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고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내 아이들과 꿀 떨어지는 달콤한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고 부질없는 대화와 의미없는 유흥으로 아까운 젊음을 날려보냈다. 그리하면 기다리고 참으면 궁극의 즐거움에 닿을 줄 알았고 찬란한 기쁨의 순간이 언젠가 찾아오리라 믿었다. 열정과 자만에 이끌렸고 무지와 나태에 눈이 가려져 있었다. 큰 기쁨은 일년을 꼬박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란 걸 몰랐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소소한 기쁨들이 눈덩이처럼 뭉쳐서 큰 기쁨으로 안긴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비 그친 다음날 오랜만에 올려다 본 푸른 하늘에 상쾌해하고, 출근길에 마주친 엄마의 손가락을 쥔 걸음마 배우는 아기의 희고 도톰한 손에서 사랑을 느끼며, 단단한 인도 블록 틈바구니를 비집고 올라온 이름모를 꽃의 생명력에 탄복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작은 기쁨은 절제와 평정심이 가져다 준다. 쏟아지는 뉴스거리에 눈과 귀를 닫아 시시각각 돌변하는 주변 정세와 최신 트랜드를 모른다고 해서 최근 개봉한 영화 몇 편, 새로 나온 책 몇 권쯤 안 봤다고해서 내 삶이 뒤쳐지거나 그리 달라질 건 없다. 차라리 그 시간과 정력으로 소중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나면 다시 볼 수 없는 자연을 찾아나서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줄 것이다.

친구가 나를 꼭 데려가고 싶은 식당이라고 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뤘었는데 오늘에서야 갔다.
신당동 중앙시장 안에 있는 생선집이다. 위치부터 마음에 든다. 나는 평소에도 시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길 즐기는데다 거기 있는 식당이라면 무한 신뢰를 가지는 편이다.
여러번 방송에 소개된 모양이다. 꾸덕꾸덕 말린 반건조 생선이 주종목이라고 했다. 시크니처 메뉴라는 병어조림과 서대구이를 시켰다. 우리 테이블에 잘못 서빙됐다 금새 되가져간 갑오징어 구이도 어른 손가락 굵기에 맛있어 보였다. “에이 하나 집어 먹어볼 걸” 시덥잖은 농이 절로 나왔다.

재래시장의 현대화 작업으로 지붕을 이지 않은 공간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도 제법 사람들이 많다. 음식이 나올 동안 일부러 돌아봤다. 테이블에 놓인 파전을 보니 만만찮은 솜씨다. 젊은 사람들은 젓가락 들기 전부터 사진에 담는 게 일상이 됐다. 갑자기 그들이 마시는 맥주와 파전에도 구미가 당긴다.
이윽고 주문했던 메뉴가 나왔다. 눈으로만 맛을 봐도 왜 그렇게 오자고 했는지 알겠다. 공기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병어조림, 서대구이도 기막히지만 서대구이 접시에 딸려나온 야채무침만으로도 막걸리 두 세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역 초무침, 무채 무침 등 밑반찬도 다시 채워야 했다.
조금은 들떴던 게 분명하다. 친구는 그럴줄 알았다는듯이 좋아한다. 내가 싼 값에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서. 나는 내 취향과 식성을  챙겨 끌고 온 친구가 고마웠다. 일부러 공기밥에는 손에 대지 않았건만 포식했다.

배를 꺼뜨려야 했다. 청계천변을 따라 광화문까지 걸었다. 저녁 공기를 쐬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연인들이 짝을 이뤄 앉아 있다. 물에 발을 담그고 꼼짝도 않길래 조형물인 줄 알았더니 텃새가 된 왜가리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더니 경쾌한 음악이 들린다. 인공 물안개 쇼다. 덮혀있을 때는 분명 없었을 나무들이 제법 굵다. 좀 자란 나무들을 옮겨 심었을런지 모른다. 이제는 수초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비록 펌프로 물을 퍼올려 흘려내리게끔 한 것이나 개발 당시 발견된 유적을 제대로 못살린 오점이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좋은 도심공간이다.
폭포만큼은 아니지만 벽천에서도 물이 양껏 쏟아져 내린다. 초파일이 다가와서인지 각종 등 들어간 종이조형물 세워져있다. 눈쌀을 찌푸리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소리 하니 친구는 그 또한 짐작했던 바라며 웃는다.
훠이적 훠이적 걷다보니 어느덧 도착했다. "1키로 정도 됐나?" 물으니 족히 4키로는 된다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배는 덜 꺼졌고 그제서야 장단지는 기분좋게 묵직하다. 공기밥을 절제했지만 막걸리가 대신했고 달뜬 기분에 평정심이 흔들린 저녁이었다.
내 세대까지는 아직 찾아 갈 수 있는 저렴한 맛집이 남아있고 나는 산책을 할 수 있을만큼 건강하다. 축제나 불꽃놀이가 아니어도 눈과 귀가 즐거운 감성을 지녔으며 무엇보다 나를 챙기고 내 기쁨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친구가 있다.
가짜 분주함을 가릴 줄 알며 작은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능력만 갖춰도 인생은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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