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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21. 2021

또라이

미친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상은 풍요로워진다. 일이나 사람에게 미친다면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삶의 이유처럼 덤비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다.

누군가를 혹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된다. 환경운동가, 봉사활동가, 테레사 수녀부터 오드리 헵번, 그리고 이름없는 자원봉사자까지 그들의 광채로 세상은 빛난다.

자신의 일에 미친 사람들이 있다. 저물고 사라지는 직업이 있는 반면 새롭고 다양한 직업이 탄생한다. '영화 그래픽 아티스트' 그리고 '세퍼레이터'가 그렇다.
가상 국가의 우표나 작은 명함부터 한 세기전 포장상자까지 영화의 소품으로 쓰이는 종이쪼가리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직업이 '영화 그래픽 디자이너'다. 영화에서 색바래고 귀퉁이 그을린 보물섬 지도를 볼 때 그리고  오랫동안 유리병안에 봉해져 망망대해를 떠돌던 로빈손크루소의 편지를 볼 때면 어디서 구했을지 궁금했다.
그런 영화의 소품을 직접 디자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멘들스 박스'로 유명한 '애니 앳킨스'다. 영화 그래픽 디자인계의 선구자 격인 그녀의 책이 출간됐다. <애니 앳킨스 컬렉션>이다.

<애니 앳킨스 켈렉션>에는 그녀의 작품 사진들이 실려 있다. 내가 소장한 책들중에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이런 그림이나 사진 위주의 디자인관련 서적이다. 직업과 관련해서 20년 넘게 모은 이 책과 잡지들은 대부분 외국서적이다. 구입 당시 보통 단행본이 한 권에 평균 7~8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진이나 회화 전시장에서 구입하게 되는 도록은 5만원~10만원대였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국내 서적의 책값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애니 앳킨스 컬렉션>은 31,500원이다.

책이 도착했다. 고호1,2편에 이은 유화컴퍼니의 <갤러리북> 시리즈 <클로드 모네>편이다. 책값 29,800원이 흥미롭다. 3만원에서 200원이 빠진다. 홈쇼핑에서 흔히 보는 얄팍한 상술처럼도 느껴지는데 내막을 알고보면 왠지 처연해진다. 그림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지만 지금까지 봐온 어느 도록보다 종이와 인쇄의 퀄리티가 탁월하다.
유화작품을 주로 다뤄서 유화컴퍼니인줄 알았더니 출판사 대표의 이름이 유화다. 명작 원화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 인쇄, 인화한 작품 사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스란히 재현해내는 사진 인쇄가 그의 꿈이었다.

오랜 세월을 인쇄에 미쳐 많은 돈을 날렸다. 명화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그대로 전하겠다는 한 인쇄 장인의 노력과 집념이 고스란히 담긴 책의 가격치고는 너무 저렴하다. 원화를 직접 감상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잘 만든 화집을 통해 벅찬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다는 그의 바램이 담겨있어서다. 30~40대 학부모가 주 고객층이다. 그들을 대상으로 시장조사를 해보니 한국 대중 예술 화집의 가격저항선이 3만원이었단다.
수입 종이, 수제 잉크로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 낮은 가격에도 판매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묘안을 낸 게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판비용을 사전에 확보한 후 출판하는 것이었다. 펀딩 참가자 1500명의 이름이 뒷장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저자의 싸인보다 값지다.
지금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앞다퉈 그를 찾는다고 했다. 종이·잉크·인쇄기 등 인쇄의 전 영역을 훤히 꿰고 있는 국내 유일의 '세퍼레이터'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미친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종합 예술이라는 영화의 영역에서 한 귀퉁이도 차지 못할 것 같은 소품. 그중에서도 종이쪼가리를 붙들고 씨름하는 '영화 그래픽 디자이너', 사양산업이라는 인쇄분야에서 원화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재현해보겠다고 덤벼드는 '세퍼레이터'  
쉽고 편한 길, 남들이 알아주고 돈이 되는 일을 쫓는 세태에 그들은 외롭지만 고고한 또라이다. 세상을 덜 썩게하는 방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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