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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21. 2021

친구 -2021

나무들을 베어낸단다. 국유림이 아니라 사유림이라고도 하고 숲과 토양의 탄소흡수량을 두고도 상반된 주장을 한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도 잔 가지까지 훑어나가다보면 무성한 이파리에 어느새 본질은 가려지고 만다. 늘 그래왔다.

기후변화, 지구환경, 탄소중립 어떤 가지로 뻗더라도 문제의 뿌리는 하나다. 뿌리는 성장이 아니라 생명이고, 보존이 아니라 회복이다. 생명에 촛점을 맞춰야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나무나 숲의 탄소흡수량을 따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경제림, 공익림이란다. 누가 붙인 이름인가. 나무가 그리 불러달라고 그런 용도로 써달라고 했던가.
산주가 조림했단다. 정말인가. 그가 비를 뿌리고 햇볕을 쬐였으며 흙을 만들어 덮어줬다는 말인가.
진정 나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적어도 지구 입장에서 암세포는 인간이지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쓰레기를 버려 바다에 떠다니는 섬을 만들지도 않고 해양생물을 고갈시키지도 않으며 지구가 수억년 품고있던 화석연료를 뽑아쓰지도 않는다.
주부가 바뀌고 빌려쓰는 주제에 주인행세를 한다. 원인 제공자인데 치유책조차도 자의적이고 오만하기 그지없다. 땅, 바다, 물, 공기, 흙 인간이 만들지않은 것들은 모두 신성하다. 신성함을 더럽힌 건 곰도 물고기도 나무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서슴없이 저질러왔다.
보호해주지 않고 내버려두기만 해도 된다. 심지 않아도 좋으니 베지말라는 말이다.

나는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연의 치유력를 앞설 수 없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이제껏 하던 짓을 멈추고, 누리던 것들을 버리고 불편을 감수해야한다.
케이블카 타고서라도 산에 오르겠다는 아집, 갖은 핑계로 채우려는 사욕, 눈가리고 아웅하는 시늉따위는 집어쳐야지 이 악순환이 멈춘다.
아마존에서 베어낸 좋은 원목은 가공해서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선진국이 가져다 쓴다. 그 나라  도로를 메운 자동차의 타이어는 나무의 생채기 고름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만든다. 못사는 나라 땔깜 들여와 때던 제나라 공장굴뚝에 연기 멈추고 돈놀이하며 떵떵거릴만큼 배부르니 못사는 나라는 트림도 하지 말란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쓰는 차를 만든단다. 전기는 번개칠때 거저 얻어지는 것인가. 어떻게든 다리는 엑설레이터를 밟는데만 쓰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소의 방귀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란다. 소가 웃을 일이다. 소를 가축화해서 무한 증식시킨 건 인간이다. 소의 항문을 틀어막으려 드는 것과 고기를 덜먹고 대체재를 찾는 노력 어느 편이 현명한가.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환경평가를 설악산 산양이 한다면, 철탑이 박힐 땅이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목을 베어낸 자리에 더 많은 묘목을 심어주마하면 숲이 좋아하고 고마워할까.  
그만하자. 마이 무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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