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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29. 2021

일하다보면

지금은 성공한 어느 연예인의 가난했던 어린시절 일화에 지하 셋방이 언급됐다.
이사 간 날 "아빠 왜 방에 창문이 없어?"라고 어린 딸이 의아해했다. 다음날 잠을 깬 딸은 아빠가 밤새 벽에 그려놓은 창문을 보게됐다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하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낮은 천장을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강남 역세권에 있는 저택 한 채를 회사 사옥으로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인데 지하층의 절반 정도를 노부부가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오래된 저택에는 이런 구조가 많다. 말하자면 가정부나 집사 가족이 머물던 방이다.
사전 현장 방문을 하며 셋방 할아버지를 몇 번 뵈었다. 할머니는 편찮으셔서 거의 바깥 출입이 없으셨다. 이런저런 사정이 얽혀 다른 층과 지하층 절반(주인이 쓰던 공간)을 먼저 착공하고 노부부가 이사 나간 후 나머지 공사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굳이 몰라도 될 저간의 사정, 혼자되신 주인 할머니과 세입자인 노부부의 신상까지 알게 됐다. 셋방 할머니가 정기적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환자셔서 방문이 조심스러웠다. 양해를 구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체크했다.
두 분이 머무시는 방에도 그리고 작은 병에도 꽉 찬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물이 샌 흔적이 있어 연유를 여쭤보다 주인집에서 무심했음을 눈치채게 됐다.
저택 화단의 나무며 화분의 화초들을 거의 셋방 할아버지가 자진해서 가꾸셨다는 것도 알게됐다. 나무 이름이며 손수 심으신 방아와 꽃들을 일일이 설명해주셨다.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나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드릴 수 밖에  없었다.

주인 할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뜨신 후 혼자 저택을 관리하기 버거워 아파트로 이사를 가신다고 했다. 그런데 세입자인 두 분이 컴컴한 지하의 무척 저렴했을 전세가로 이사갈 집을 구하기 어려우셨을 것은 당연하다.
보라매공원 근처로 이사를 가신다고 했다. 그마저도 사정을 딱하게 여긴 매수자측 부동산 중개인이 무료로 찾아 나선 결과다.

여든쯤 되셨을까 비슷한 또래인 숏 컷트 은발이 세련미를 더하는 주인 할머니는 '이대나온 여자'셨고, 셋방 할머니는 서울대를 나온 인텔리 신여성이라고 했다.
어쩌다보니 셋방 할아버지의 질곡 많은 삶까지 듣게 됐다. 강남 주변의 변천사를 꿰고 계신데다 이곳저곳을 전전했지만 오랫동안 떠나신 적은 없다고 하니 차츰 내리막길이셨음을 짐작하겠다.
젊은 시절 컴퓨터 부품을 생산하는 꽤 규모있는 업체를 운영하셨다고 했다. 20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고 꿈에 부풀어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납품 직전에 물거품이 됐다. 때는 1979년. 갑작스런 박정희의 서거로 외국에서는 곧 한반도에 전쟁이 날거라는 소문이 돌아 해외발주처와의 거래가 무산된 것이다. 복구하기 힘든 손해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직원들은 내 얼굴만 쳐다보는데….. 1년 넘게 내 살 깎아 월급 주며 버텼는데 안되겠더라구. 정리했지.”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할아버지의 이전 실적과 경험을 아까워했던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재기를 꿈꾸며 다시 공장을 차리고 회사를 세웠다. 이번에는 국내 기업이 발주처였다. 그런데 하필 주거래처가 삼보컴퓨터였다. 어느날 삼보컴퓨터의 직원이 귀띔을 해줬단다. 자신의 회사는 이제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우직하게 6개월을 더 버티다 문을 닫았다.
그렇게 두번째 실패를 하고나니 여력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차츰 가세가 기울다 지하 셋방에까지 몰린 것이다. 두 방을 가득 채운 옷가지들만이 옛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웃으시며 옛 기억을 떠올리시는데 내 마음이 시큰해졌다. 감히 자녀 얘기를 물어볼 수 없었다. 하실만 했으면 진작에 하셨을 것이다.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반세기만에 세계가 놀라는 경제 발전과 정치 격변을 치른 한국에서 운구기일정도가 적당한 비율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되는 일도 없는 기회의 시대였을테고 또 다른 이에게는 될 일조차 안되는 암흑의 시대였을 것이다.
사카린을 밀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군부독재자에게 밑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재계 7위 기업이 한 순간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다.

일촉즉발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했던 시대를 건너온 세대에게 운칠기삼은 후한 게 아닌가 싶다. 아차하는 순간 주인 할머니와 셋방 할머니의 노후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갑작스레 죽지만 않았어도, 거래처가 삼보가 아니었어도 셋방 할아버지부부는 조물주 다음 간다는 강남의 건물주가 되어 있을 지 모른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복록이 결코 내 능력만으로 일군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도, 한순간에 누군가와 바뀐 운명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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