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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쥬?

by 문성훈

드라이 아이스 채운 스티로폴 박스를 막 열었을 때의 시린 김처럼 스믈스믈 피더니 순식간에 짙은 안개로 앞을 가로막기를 반복했다.

분명 아스팔트에서 피어 올라오는 건 아니었다. 문득 호젓한 산 길이라 오가는 차량이 없어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오랜만에 가지는 단 둘만의 드라이브를 만끽하며 재잘대는 중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각.
딸아이의 수다마저 없었다면 을씬년스럽기 그지없는 밤 운전이다. 밤 늦게 공항에 도착한 딸아이와 코로나로 겨우 찾아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한 게 11시경이다. 네비가 알려준 대로면 숙소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어느덧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런 길이 있었던가?' 지름길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안개는 옅어지기를 멈춘다. 마치 양 풀섶에서 누군가 연무기로 장난을 치는 것만 같다.
모닝의 가녀린 헤드라이트 불빛은 두터운 안개를 버거워한다.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뻗어 두꺼운 솜 더미 속에서 헤쳐나오려 허우적 대는 것 같다.
딸아이가 하던 말을 멈춘다.
"아빠 남은 거리가 더 길어졌어. 왜 이래?"
"그러게 잘 보고 왔는데.... 바뀐 경로도 아니고...."
타닥거리며 바퀴가 돌을 튀기는 소리가 왠지 거슬린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산길이다. 이제는 차라리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반가울 것만 같다. 그렇다고 차창 문을 열어 길을 묻지는 않겠지만.

"어. 이거 네비 왜 이래? " 이번에는 내 차례다. 넓은 장소도 로타리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네비 화면은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돌라고 지시한다. 그러다 갑자기 길이 끊겼다. 헤드라이트 불빛 나무가 뺴곡히 들어찬 숲을 뚫지 못한 채 멈췄다.
"차를 돌려야 겠는데...." 네비 화면 화살표는 여전히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길 폭이 좁아 후진을 해야 한다.
"윙~~" 공회전을 한다. 기어가 중립 위치에 놓였나보다. 다시 D로 올렸다가 R에 놓는다. 그런데도 꿈쩍 하지 않는다. 공회전 소리만 들린다. 한번 두번....안된다. 고작 나온 지 1년도 안된 신차다. 마침내 전진을 했다가 다시 후진을 한다. 딸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찔끔찔끔 전후진을 반복하면서 겨울 차를 돌려세운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나는 분명히 봤다. 작은 분교의 교문같은 조형물에 새겨진 "OOO 공동묘지"라는 글자를.
지금은 '공동'이었는지 '공설'이었는지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다음날 호기심에 부근 묘지들을 검색하면서 본 '공설묘지'란 명칭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딸 아이는 못본 눈치다.

이제 길은 내리막이다.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인지 차 안은 등골까지 서늘한데 한 줄기 땀이 얕은 등 고랑을 타고 천천히 흘러 내린다. 기분인지 실제로 그런지 가늠이 안된다. 백밀러를 보지 못한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다.

이윽고 아스팔트 길을 만났다. 그러고보니 가습기를 끈 것처럼 안개도 슬그머니 걷혔다.
"그래서 아까 그 교수가 너한테 했다고 한 말 말이야 ....." 일부러 딸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잠시 긴장했던 딸은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잇는다.
숙소까지는 몇 키로 남지 않았다. 익숙한 길이 나타났다. 진입로 양 쪽에 세워놓은 조명 불빛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꼬마전구보다 정겹고 반갑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너 이거 들고 먼저 들어가 아빠는 담배 한 대 피고 들어갈게"
"응"
딸아이가 숙소 입구로 들어가는 걸 보고 이제서야 차를 살핀다. 웬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흰색 모닝은 유난히 하얗다.. 빙산의 색깔이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얗게 질린 아이같다. 찬찬히 앞에서부터 옆으로 그리고 뒤로 돌아가보는데. 그런데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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