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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22. 2021

요즘 늙은 것들은...  1편

애국심

비가 쏟아진다. 양동이로 퍼붓는듯한 게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연상시킨다.
가을 장마라고도 했다. 나는 얼마전까지 우리를 뜨겁게 달궜던 올림픽 열기를 식히는 비이고, 그 벅찬 감동과 진정한 의미를 영원히 이어가는 ‘올림픽 버킷 챌린지’이길 간절히 바란다.

7.7.7...  7이라는 숫자로 기억하면 쉬울 종목이 있다. 럭비다. 올림픽에서나마 관심을 받는 핸드볼 같은 ‘비인기 종목’이 아니라 그런 종목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비인지 종목’이다.
7명(15인제도 있다)의 선수가 전,후반 7분씩 뛴다. 가장 큰 득점은 트라이(5점) 시 주어지는 추가 득점(2점)까지 성공시켜 획득하는 7점이다.
거기에 한국은 7 하나가 더 붙는다. 프로팀은 아예 없고, 실업팀과 대학팀을 다 합쳐야 7개팀 밖에 없는 종목이다.
그런 럭비가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98년만에 기적적으로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은 세계 31위다. 본선 기록은 5전 5패로 참가 12팀 중에 꼴찌를 기록했다. ‘자랑스러운 꼴찌’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 상대한 일본은 세계 10위의 럭비강국이다. 3부리그까지 운영되는 많은 프로팀들을 거느린 일본은 2016년 4강까지 오른 팀이다. 다른 비교는 필요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등록선수가 10만명이다. 한국의 등록 선수는 1천명이다.
결과는 31대 19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말을 실감하고 싶다면 찾아 볼 경기다.

어느 한 선수 지목할 수 없이 훌륭한 경기를 펼쳤는데 이 경기에서 트라이를 성공시켰고 한일전 패배 후 유독 펑펑 울었던 선수가 있다. ‘안드레진 코퀴야드’ 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아버지가 미국인이다. 귀화했다지만 한국이 1998년까지 부계주의 국적을 채택했던 탓이다. 어머니는 1세대 모델로 불리는 한국인 김동수씨다. 그는 미국  청소년 대표를 했고 홍콩에서 국가대표 제안까지 했는데 뿌리쳤다. 그런 그가  훨씬 좋은 환경과 훌륭한 직장까지 마다하고 귀화해서 럭비 불모지인 한국의 국가대표가 됐다.  
“저는 항상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국제학교 다니고 대학교도 영어로 다녔지만 마음속으론 한국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왜냐면 전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서울에서 태어났고 유치원까지 한국에서 다녔고…
하지만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전 한국사람이 아닐거예요 외모 때문에….
상하이에서 되게 좋은 인생을 살고 있었어요. 저는 그런걸 다 포기하고 한국 온 게 럭비를 잘해서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일본 럭비프로팀의 높은 연봉과 대우를 버리고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단 정연식 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198 Cm, 100 Kg 유창한 한국어만 빼면 어느모로 봐도 안드레진은 벽안의 외국인이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는 사람들이 귀화한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 오히려 럭비로 조국을 찾았고,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태극 마크를 달았으니 그런 큰 선물을 받은 자신이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그 얘기에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유도의 안창림은 재일교포 3세다. 안드레진과는 반대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주의 채택으로 일본에서 태어나고도 한국 국적을 가졌다. 2016년까지 세계 1위였던 뛰어난 실력으로 수차례 귀화를 종용 받았지만 한국인이길 고집했다.  
“근데 그건 아닌거 같아서… 조센진 조센진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학교에서도 그랬고,  교토 습격 사건(혐한 시위대가 조선 제1초급학교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 때 제 동생이 그 학교에 있었어요. 그때 애들이 그 학교 학생들이 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대요. 너무 무섭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기고 일본사람 볼 때마다 벌벌 떠는 애들도 있었다고 하고,
사실 그것 때문에 반일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생겼어요. 제가 운동할 때 그 경계심이 동기부여로 바뀌었죠. ‘일본사람들한테 절대 지면 안된다.' 이렇게….” 어린 나이였을텐데 두려움과 경계심을 동기부여로 승화시킨 정신력이 대단하다.

그 뿌리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성숙한 인격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대학교 첫 교장님이세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학교를 세우시고, 교육을 하시니까…. 제가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로부터의 배움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 제일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바꿀 수 없어요. 사실 재일교포라는 걸 더 강하게 느낀 것은 한국에 넘어왔을 때였어요. 일본에 있을 때는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그렇게 크게는 못 느꼈는데 여기와서 재일교포는 저 혼자잖아요. 더 심한 말 하는 사람도 있었고 ‘ㅇㅇㅇ'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본놈’하는 사람도...
무슨 일 있으면 ‘아 일본에서 했으니까 일본에서 자랐으니까… 다 이런 말 들어가지고 좋든 안좋든 그러니까 저는 더 그런 사람들한테 절대 편견이나 차별을 갖지 않고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대 청년이 50대 중년에게 깨달음을 준다. 운동선수로서의 그의 바램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한테 저는 용기가 되고 싶고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되면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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