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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25. 2021

요즘 늙은 것들은....6편

정치와 언론 그리고 올림픽

뜬금없이 떡볶이가 친일 논란에 불을 지핀다. 엉뚱한 순국선열 영정에 술 따르는 사진을 올려놓고 흰소리를 한다. 가족 모임에 애국가를 제창한 걸 두고 애국심이냐 전체주의냐 공방이 뜨겁다. 없는 사람을 괄시해도 유분수지 부정식품을 권하는 사람이 있질 않나 정부 비판에 아프카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까지 소환하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다.
부정입학 보도 소송에서 6전 6패를 기록한 전 야당 대표의 기사는 눈을 비비고 뒤져야 찾을 수 있는데, 검찰 권력의 횡포와 부패한 언론에 찢어 발겨진 전 장관의 가족 수난사는 그칠 기미가 안보인다.

과거로 회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금의 국내 정세를 보면서 나는 세계사에 유래 없는 압축 성장을 한 한국이 조로(早老)할까봐 걱정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청소년기처럼 성장통을 앓는 것이라 믿고 싶고, 젊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골다공증이 아니길 바란다.
양궁처럼 세계가 추앙하는 코로나 방역을 성공시킨 한국이, 일본의 거센 무역보복마저 경쟁력 확보로 전환시킨 저력을 가진 내 나라가 시대를 선도하기는 커녕 멀찌감치 뒤쳐져 게으름을 피는 정치와 거짓과 가짜가 일상화된 언론에게 발목을 잡혀 미래를 도모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한국의 정치는 늙었고, 언론은 썩었다. 늙은 정치는 관에 넣어 매장 시키고, 언론의 썩은 부위는 수술로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정치가 앞장서고, 새 살이 돋은 뽀얀 얼굴을 한 언론을 만날 수 있다.
그런 걱정을 했었고 바램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이 한반도에 드리워진 어둠을 뚫는 한줄기 빛을 느끼게 해줬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올림픽이 도쿄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는 친일, 반일, 토왜라는 단어가 여름 모기떼처럼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일본 한복판에서 이미 극일을 실천하고 보여줬다.
일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배구팀이 그리고 럭비팀이 그랬다. 일본의 월등한 경기력과 수준부터 인정했다. 그 기량차를 여자배구팀은 원팀이 되어서 탄탄한 팀웍과 끈기로 극복했다. 럭비팀은 주눅들지 않는 자신감과 투지로 무장해서 맞섰고 일본팀을 당혹시켰다.
일본이라고 하면 머리부터 조아리고, 패배의식에 젖는 일부 국민과 정치인에게 경각심을 주고 국민에게는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는 신호를 현해탄 너머에서 보낸 것이다.  두려움과 차별을 경험했으면서도 그 반일 감정을 자기 극복과 성장의 동력으로 연소시킨 안창림은 극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줬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제창한다고 해서, 팔이 아프도록 태극기를 흔든다고 애국심이 고양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말은 반만 맞거나 틀린 말이다.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칸트”고 해야 옳다. 결국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애국가 제창과 국민의례가 사적 공간까지 침범할 때는 파시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국가를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의 계약으로 성립한 '정치체'로 보며 책임을 강조하는 요즘 시대 정신에도 역행하기 때문이다. 5.18희생자를 폭도로 몰아세우고, 국가 방역체계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든다.
태극기가 상시로 걸려있는 검찰청에서 불법과 비리,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과거 안기부에서 고문 희생자가 나왔다.
국가는 국민이고, 국민이 곧 국가다.

이번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많이 쓰인 단어들이 있다.
과정, 행복(해피), 상대, 기약(다음), 삶, 변화(바뀌다), 즐기면서 그리고 ‘국민’이다. 내 기억으로 과거에는 대한민국(조국), 영광, 부모, 감사 등의 말이 주류를 이뤘던 것 같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국민을 국가로 여기고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려는 젊은 세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 아닌가 싶다.
심지어 현역 군인 신분인 우상혁조차  ‘조국(대한민국)’ ‘영광’같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자신감을 가지고 출전해서 후회없는 경기를 펼쳤으니 홀가분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들의 애국심은 자신을 사랑하고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므로써 느끼는 행복감인 것이다.

안드레진은 왜 그렇게 한일전 승리에 집착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한일전만 이기면 국민이 행복할 것 같아서…. 다 져도 한일전만 이기면 고개들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시합을 져서 너무 미안했어요.”
일본이 원수처럼 여겨져서가 아니라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첫 시합에서 10년 넘게 대표팀을 뛴 최고참 선수가 태극 유니폼을 받아 들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 태극마크가 이런 거구나… 아 진짜 다르구나’하고 느꼈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왜 우느냐?” 는 이어진 질문에 “그 장면이 생각나서... 저도 유니폼 받을 때마다 울컥하거든요 . 왜냐면 저 전에 입었던 선수들, 나만 대표하는 게 아니라 그전에 했던 사람들도 대표해야 하니까”라고 했다.
그 역시도 조국은 곧 국민이고, 그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애국인 것이다.
국민이 달아준 태극마크의 의미는 선배 선수들 몫까지 뛰어야 한다는 절실함까지 더해져 사명감으로 무겁게 다가온 것이다. 지나간 역사와 선조를 잊지않겠다는 다짐과 다를 바가 없다.

젊은 감각, 젊은 애국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것만 같다.
그들은 역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다짐도 빠트리지 않는다. 정연식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응원 댓글이 “전력을 다한 당신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미래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안드레진은  이렇게 자신의 바램을 밝혔다. “제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지만 마지막 선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들이 짊어지고 나갈 미래가 밝지 않을 이유가 없다.

쓰라린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안주해서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늙었다.
시대를 역행하고 낡은 이데올로기로 립서비스와 권모술수로 권력을 취하려는 것들도 늙었다. 늙어빠지고 썩은 정신으로 젊은 육신의 껍데기를 두른 방만한 것들도 늙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대적 사명과 신선한 사고의 거친 광풍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 젊게 사는 법이다. 요즘 늙은 것들은 버르장머리도 없고 젊은이 행세를 한다.

나는 이번 올림픽이 안겨 준 희망의 빗줄기가 ‘올림픽 버킷 챌린지’처럼 온 국민들 사이에 번져 나가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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