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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25. 2021

껍데기는 가라

 "사실 전문가의 의무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주는 데 있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다 알아듣는 이야기로 설명하면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전문가적 허세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일까?"
심리학자 김정운의 이 말이 내 귀과녁에 날아와 꽂힌다.

나역시 디자인을 한답시고, 노다가판을 뒹굴지만 흙 한톨 묻히지 않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쉬운 말을 두고 전문용어를 골라 쓰고, 안되는 혀를 굴려 영어를 섞어야 만족했다.
치기어린 '인정욕구', 이상과 실제 사이를 오가면서 겪던 '열등감', 자존감이나 자긍심이라고 하기엔 낯뜨거운 '우월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무심히 간과해 버린 쉽고 간단한 데서 발생했고, 어떤 허위와 가식으로도 돌파할 수 없었다. 삶은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고, 언제나 해법은 둘러가기 보다 질러가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이렇게 유일하고도 독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도 더 낮은 확률로 만나 바로 '그' 사람들과 인연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특정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경이와 감탄을 자아낸다."
철학자 백승영이 암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은 후 극복과정에서 쓴 에세이 <파테이 마토스>의 한 구절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경이와 감탄의 대상이라고 했으니 '지금' 그리고 내가 있는 '여기'도 그러하다. 오늘 하루는 이 한 구절만으로도 벅차게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사유, 자아, 성찰, 존재.... 사뭇 현학적이고 그럴듯한 단어 하나 없이도 깨우침을 주는 글은 위대하다. 언제든 소매 걷고 한번 휘이 젓기만 하면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들을 불러 올린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다.
초서체의 높다란 병풍 뒤에서 자신의 계급을 확인이라도 한듯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족감 충만한 어휘를 동원해 변사 흉내를 내는 글을 대할 때면 나는 이런 혼잣말로 피식 웃어넘긴다. '잘났어.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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