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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25. 2021

나는 애비다

애비가 자식의 일로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느끼는 감정을 안다. 나 역시 애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내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식이 눈 앞에서 살점이 뜯기고 피흘리는 걸 지켜보는 심정은 상상하는 것만으도 숨이 가쁘다.

오래전 본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 2014)'에서 미군을 도왔다는 의혹으로 한 무슬림 가족이 참살되는 장면이 나왔다.
'도살자'라 불리는 행동대장은 그 애비를 벌한다고 마을 공터에다 어린 아들을 쓰러뜨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동드릴로 어린 아들의 허벅지를 뚫는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를 뚫어 죽인다. 애비는 절규한다. 붙잡힌 팔을 뿌리치고 뛰어나오다 총탄에 쓰러진다.
나는 차라리 그 애비가 죽은 것에 안도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쾌하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그 장면을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조국은 교수다. 법대 교수다. 부산대 총장도 법대를 나온 검찰 출신이다.
나는 감정적인데다  '법알못'에 가깝다.
광장에서 내 새끼가 도륙당하는 지켜보느니 달려 들어 먼저 죽는 애비가 되고 싶다. 그까짓 고무줄 같은 법이나 잘난 교수들의 논의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지.

조국 교수가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 고통의 전율을 고스란히 느낀다. 이런 감정을 두고 일부 심리학자들은  '공감sympathy'과 '감정이입empathy'로 구분한다.
'공감'은 SNS의 '좋아요' 댓글처럼 상대방의 감정에 호응하는 제3자의 반응인데 반해, '감정이입'은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하며 완전히 결합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해외의 사건, 사고, 일면식도 없는 남의 일에 흥분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내가 경험하고 있지 않아도 타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감정이입'이다. 스크린 속 머리가 뚫리는 아들의 애비로 빙의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내 딸이 당하고 있는 일이 아님에도 지켜보는 애비의 고통에 전율하는 이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적 설득' 보다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설득'이 훨씬 더 잘 작동되는 이유도 바로 감정이입 능력 때문이다.  
논리는 인지적 과정이다. 설득의 대상과 주체가 분명하게 나뉜다.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설득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그들의 지적질하는 손가락을 꺾어 버리고 싶고, 그들이 내리는 판결에 승복하기 힘든 이유다. 머리와 주둥이를 동원해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논리적 굴복을 요구하면  반항심이 일기 마련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더라도 마음 속에서는 '그래 너 잘났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이 되는 정서적 설득은 강력하다. 너와 내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걸 상대가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설득은 없다. 마음이 건너가 이미 하나가 된 둘에게 논리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의전원인지 국정원인지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다. 복지부인지 복지부동인지의 허울뿐인 발표 따위는 필요없다.
자신을 노린 올가미에 목이 걸려 신음하는 딸을 지켜보는 애비 조국이 있을 뿐이다. 내가 조국이다.
내가 조민의 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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