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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Aug 30. 2021

묘비명

휴일의 하루는 유난히 짧다. 집안에만 머물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이 슬그머니 긴 손바닥을 내미는 날이 있다. 성글게 쌓던 한나절의 성곽을 간단히 허물어 버린다. 그런 날은 온 종일 허우룩하다.

아침 일찍 근교 올레길 걷자는 아내의 손길을 물리치고 늦잠을 잤다. 아점을 먹고 가방을 챙겼다. 게으름을 떨치고 잡다한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동네 카페로 피신해야한다. 제법 선선해졌다.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반쯤 읽었던 책 한 권을 뗐다. 좋다. 같은 작가의 책이 더 나왔는지 스마트폰을 두드린다. 인근 중고서점에 있다.
내친 김에 책 속에 나온 책도 검색한다. 딱 한 권이, 그것도 같은 중고서점에 나와있다. 운이 좋다. 이런 건은 지체하면 안된다. 금방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절판된 책 한 권이 나와있었는데 서점까지 걸어가는 동안 누군가 먼저 가져가 버렸다. 털래털래 맥빠져서 돌아왔다.

서둘러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카페를 나섰다. 걷던 중에 무심히 SNS 글을 들춰보다가 눈에 띄는 서평을 읽었다. 신간이라 교보에 있다. 중고서점 들렀다가 교보를 거쳐 귀가하는 코스로 변경한다.
중고서점에 도착했다. 한 권뿐인 책이 꽂힌 번호의 서가부터 찾는다. 그리고 또 두번째 책까지 챙겼다. 여유가 생겼다. 컴퓨터 검색대가 눈에 띈다. 관심책으로 앱에 저장해뒀던 목록을 찾아본다. 한 권이 더 있다.
세 권 값을 치르고 교보로 향한다. 가방에는 이미 가지고 나온 책 때문에 넣을 공간이 없다. 책  세권을 안고 교보까지 걷기는 무리다. 버스를 탄다. 교보에 들러 마저 한 권을 사고나니 네 권이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애초 들고 나왔던 책이 좋아 같은 작가의 책 한권을 사려 했던 것 뿐인데 네 권으로 불어났다.
늘상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다 읽게 되지도 않는다. 읽어야 할 책만 늘어나는 채무자 신세나 다름없는데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만 일년에 6만권 정도가 출간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이미 출간된 책은 물론이고 당해에 나온 책의 1/100도 감당이 안된다. 어쩌자고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겨우 책 네 권 사서 오며 뿌듯했던 가슴이 6만이란 숫자에 짓눌려 쪼그라든다.

'죽는 날까지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
한탸 (버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가 차라리 행복했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집 근처 건널목에 다다를 즈음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내 묘비에 새겨도 좋을 문장이다. '이 정도도 모르고 죽었으면 어쩔 뻔 했어.'를 이어 쓸 수도 있겠지만 사족이다. '좀 궁금해 하라지...'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ㆍㆍㆍㆍㆍㆍㆍㆍㆍ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묘비명을 적어보는 게 어떨까요? 댓글을 재기 넘치고 발랄한 자신의 묘비명으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페친님은 어떤 분이고 평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무척 궁금합니다.
"당신의 묘비명은 무엇입니까?"

#제_묘비명은_<그래도 이게 어디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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