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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0. 2021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눈은 떴지만 찌뿌둥한 몸을 깨우는데 예전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갈수록 잠은 짧아지고 식욕은 줄어든다. 나이 드는 징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안좋은 것만은 아니다. 머리가 굳어가니 정으로 파서 새기는 중이고, 기억력이 흐려지니 메모하는 습관을 들인다. 그렇게 아이 걸음마 떼듯 자연법칙에 맞서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지식은 세상의 속도를 못따라가는데 지혜는 갈아놓은 감자의 전분처럼 고요히 가라앉는 듯한 즐거움도 있다.

영화는 1초에 24장의 사진이 돌아간다.  시각으로 감지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으로는 휙 지나가는 낱장 하나씩을 보지 못하지만 뇌는 기억한다. 이걸 응용한 마켓팅도 있다. 전혀 상관없는 영화 장면이 돌아가는 사진 프레임안에 엉뚱한 가령 음료수 사진 한 컷을 끼워넣으면 상영이 끝난 후 그 상표의 음료수를 사서 마시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뇌는 오감이 놓쳤거나 인지 못한 것까지도 저장했다가 선별학ᆢ 지우길 반복하는 탁월한 메모리 칩이다. 그리고 감자 전분처럼 밑바닥에 가라앉는 기억들도 있다.
나는 요즘 들어 새삼 깨닫는 게 있으면 지난 시절 앨범을 펼쳐 그것들을 들춰낸다. 그리고 다시 주제별로 정렬하고 포스트 잇을 붙이는 작업에 맛이 들렸다. 그래도 좀 살아 본 후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휴일에 아프칸을 배경으로 한 아웃포스트(The Outpost/ 2020)란 영화를 봤다. 작품성, 오락성 그리고 완성도를 논할 처지는 못되고 그저 재미있었고 실감났다. 실제 전장이 그러했을 거라는 신빙성을 가지게 한다. 실화를 영화화 했다는데 누가 훈장을 탔는지 전공이 어떠했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우리 세대 그리고 이전 세대는 늘 방송국이 선심쓰듯 보여주는 외화, 검열을 통과한 영화를 보며 컸다. 상대가 누구든 항상 미군은 선하고 좋은 편이다. 그리고 늘 이긴다. 적의 총탄 100발 쯤은 피해다니는 주인공이 쏘는 총은 백발백중이다.
중학교 때 파월장병 출신 선생님이 그랬다. “영화 전쟁장면 그거 다 뻥이야. 어디서 감히 고개를 내밀고 쏴. 죽을라구….” 그러면서 애국심 때문에 용감해서 싸운 게 아니라고 했다. 옆에서 전우가 피 흘리고 쓰러지는 걸 보다보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싸우게 된다고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 아니라 ‘귀신 들린 해병’이 맞는지도 모른다.
실제 전장에는 총알이 튕겨나갈 것만 같은 근육질의 ‘람보’는 없다.

언제나 미군이나 한국군이 정의롭고 착한 것만도 아니란 걸 역사는 들려주고 있다. 그저 누구나 총알을 맞고 폭탄이 터지면 예외 없이 죽는다. 왜 죽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불쌍한 영혼만 너부러져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줄 세워 갈라놓는 전장에서 운이 좋으면 살고 재수없으면 죽는다는 게 유일한 진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식구처럼 먹고 자고 뒹굴던 전우가 쓰러지면 그 어떤 사명감이나 죽음의 공포도 뛰어넘는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선생님의 말을 요즘 곱씹게 된다.

그 ‘무언가’를 용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전우애’일텐데 나 역시 군 복무를 하며 비슷한 걸 느껴봤던 터라 어떤 것인지는 안다.
한 공간에서 비슷한 이유나 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절로 생겨나는 인간적인 감정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이 지닌 특수성, 비슷한 또래 사회라면 더욱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으로 물리건 이 전우애나 동료애로 불리는 일련의 유대감이 꼭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때로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한때 조폭영화가 인기몰이를 할 때가 있었다.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범죄자인데 그런 인물이 주인공이 되고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영화가 범람하는 사회는 병이 들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토해서 게워내고 싶은 묵은 감정들이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쌓여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사회생활하며 의도치 않게 접해 본 실제의 그 세계와 인물들은 영화처럼 멋있지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도 군인들의 ‘전우애’ 비슷한 게 있다. 이제는 누구든 익히 자주 들어서 아는 “으리”다. 그런데 조폭의 ‘으리’는 ‘어음’ 같은거다. 일정기간 동안은 유지해야 하고, 현금화되어야만 가치를 가지는 ‘어음’이다. 부도처리로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는 그 어음을 품고 주먹과 칼을 휘두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조폭의 맞수인 검사들 세계에도 이 ‘으리’와 비슷한 게 있다. ‘검사동일체’가 그것이다.
공부 잘한 사람들 집단이라서인지 문구로 잘 정리되어 있어 명문화되지 않은 조폭의 ‘으리’보다 ‘검사동일체’를 살펴보는 게 빠르다. 읽다보면 그 유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상명하복, 직무승계권, 직무이전권으로 이루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폭도 표현만 거칠 뿐이지 똑같다. 그들 역시 형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행동대장이 감방 가면 바로 아래 조폭이 그 역할을 이어받고, 형님이 나와바리 관리를 넘기라고 하면 다른 동료에게 넘겨야 한다.

심지어 원칙을 만든 이유마저 똑같다. “검찰사무 처리에 신속성, 통일성, 공정성을 기하고…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조폭들이 라이벌 조직과 패싸움 벌이려고 출동할 때 딱 이렇게 움직인다. 신속하게 도착해서, 함께 움직이며, 상대 조직의 위 아래를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린치를 가한다. 함부로 나서거나 돌출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건 형님의 권한이고 지시에 따라야 한다.
검사들의 '검사동일체'는 '당좌수표'같은 거다. 옷벗고 로펌가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꿔주는 '당좌수표'다. 조폭의 '어음'처럼 부도 날 염려도 없다. 하지만 근본적인 동질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군인의 ‘전우애’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적어도 군인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국토를 지킨다는 사명과 애국심이라는 높은 산의 그늘이라도 있으니까. 게다가 원치 않아도 병역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젊은 날을 바쳐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전우애’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 쯤은 눈감아 줘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조폭의 ‘으리’와 검사의 ‘동일체’는 병영 내에 갇힌 ‘전우애’와 달리 많은 사회병폐를 일으킨다.  
우선 ‘으리’와 ‘검사동일체’를 강조하는 조직 원리는 보상심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 보상은 결국 돈이나 이권이다. 조폭이 더 큰 업소를 맡고, 윗 자리로 오르려는 것도 알고 보면 왕성한 현역일 때 한 몫 단단히 챙겨 현역 은퇴 이후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검사들이 승진을 바라고 연수원 동기 혹은 학연으로 끈끈히 결속하는 이유도 옷 벗고 나갔을 때 전관예우를 받아 화려한 은퇴의 삶을 구가하려는 것이다. 조폭도 사업을 벌리면 옛 동생들을 동원하고 그  세력의 힘을 빌리듯 검사 역시 변호사가 되면 옛 동료들에게 전화하고 친정인 검찰에 줄을 댄다. 협객은 사라지고 양아치가 건달 흉내를 낸다. 강호의 의리는 무협지에나 등장하는 말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이 곧 의리이자 법이다.

나는 어느 힘 세고 음험한 노친네가 했다는 “우리가 남이가”란 말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알레르기성 질환을 앓는 사람이다.
남이다. 내가 아니면 친구, 동료 심지어 자식도,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남에 불과하다. 내가 잘 해야 하고 내가 우선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나라도 잘하고 제대로 서야 주변을 챙길 수 있다.
조폭은 ‘식구’란 말 잘 쓴다. 한 솥 밥을 먹어서가 아니다. 지금은 내 편이고 나와 이익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너와 내가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냔 식이고, 뭐라도 나눠 먹을 게 있어야 내 식구인 것이다. 내가 널 봐주면 너도 나를 봐주겠지 하는 무언의 신뢰가 저변에 깔려 있고, 서로 공유해야 내 식구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짬짜미’가 그들을 하나로 엮는다.

검찰 보스인 총장까지 지낸 이가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형님, 동생으로 지내면서 깔아놓은 내 식구들이 한 둘이겠는가.
그런데 최측근으로 수족처럼 움직인 동생이 과거 한 식구였다가 정치권에 진출한 또 다른 동생에게 건네줬다는 문건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관행처럼 검찰총장 출신으로 김앤장 같은 로펌에 이름을 올리고 수십억 거둬들였으면 별 탈 없었을텐데 스스로 업되고 넘치다보니 과했다. 구린 게 많다보니 보호막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후회해도 돌아 갈 다리는 끊겼다. 믿었던 과거의 동생은 내 식구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집 식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겁한 정치파의 새내기 식구가 되어있었다는 걸 간과했다.

뭐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조폭의 종착역은 교도소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철창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둘 다 거짓말은 밥먹듯이 하고, 기억력이 안좋아 뭐든 잘 잊고 '모른다'고 잘 하는데 그 흐리멍텅한 머리로 고시패스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검사동일체’가 아니라 ‘검폭동일체’가 시대 트랜드에 부합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형님이 시켰어도 "니가 가라 하와이!"라고 하면 군말없이 감방 가는 것도 똑같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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