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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10. 2021

갈매기야 미안

보통명사처럼 쓰인다고 해서 ‘기레기’란 말을 서슴없이 쓴 걸 후회한다.

이 나라에서 참다운 기자의 명맥이 끊어진 지는 이미 오래이고 기사다운 기사를 접하기란 하늘에 별따기가 됐다.
기사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이다. 기자는 이차원적 사실관계를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예술가적 기질과 냉철한 회계사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이 놀랍도록 향상됐다.사물을 찍는데 머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만큼 좋아졌다. 그렇다보니 아웃포커싱이 자유로워졌다. 초첨이 맞은 피사체 외에 배경을 흐릿하게 날려버리는 기능이다. 인간의 눈과는 다른 카메라만 갖춘 기능이다.
그런데 기자의 사진기가 그래서는 안된다. 사건과 인물에게만 초첨을 맞춰서는 안되고 배경까지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누구나 주목하는 피사체는 날려버리는 기능이 필요할 때가 더 많다.
평면적인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추상화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숨겨져 있거나 자칫 놓치기 쉬운 부실한 자료까지 챙기고 소수점 하나 꼼꼼히 기장하는 회계사가 되어야 한다. 누가봐도 한 눈에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재무재표 같은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그립다.
물론 현실의 인간 사회는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는 나머지 어디부터 눈을 돌려야 할 지 우리 모두가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렇다고 기사마저 호들갑스런 수다쟁이처럼 남의 얘기를 옮기기만 한다면 누구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기사는 우리와 같은 키높이에서 본 전경을 명확히 묘사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서 우리가 미처 보지못한 세계를 알려주고 크게 소리쳐 경고해주는 기사이다.
뭍 구경꾼들처럼 몰려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얘기 주워 담을 바에야 굳이 기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주머니에 찔러주는 돈 액수에 따라 편을 들고 없는 얘기까지 지어낸다면 차라리 소설을 읽는 게 낫다.

과장과 허위, 자극적인 문구라면 거리에 뒹구는 광고 찌라시만 해도 넘쳐나고 지겹다.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광고는 차분하게 관찰할 여지를 주지 않으며 3D영화에서 괴물의 대가리가 점점 커지면서 아가리가 덮쳐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 앞에까지 들이민다.
비판적인 시각과 정확한 파악은 무리이며 집요하게 감정의 진폭을 확대하고 부각되는 것만을 보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갈 즈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영화 감상평을 나누지만 조각난 장면을 꿰어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괴물이 나타났고 주인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줄거리만을 공유한 채 주머니를 뒤적거려보지만 거기에는 반토막 난 영화 티켓과 굳이 안샀어도 될 팝콘과 콜라 세트 영수증만이 들어있다.

기레기란 말은 잘못됐다. 하늘 높이 날아 세상을 조망하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용기를 가진 기러기 같은 기자도 있으니까. 고단하고 먼 여행이지만 선두를 교대하면서도 방향을 잃지않는 기러기 무리 같은 언론사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기레기 행태를 보이는 기자는 기러기와 비슷하게 생겼어도 갈매기다. 그것도 뻘이 아닌 관광객 손에 든 새우깡에 집착해서 달려드는 갈매기 말이다.

생존 본능을 상실하고 쉽고 편한 먹잇감만 찾아 유람선 주위만 맴도는 갈매기 떼들.
먼 바다와 아름다운 섬의 풍광을 가리고 하늘을 어둑하게 만드는 갈매기 떼에게 머물 자리란 없다.  
나는 기레기를 갈매기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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