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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Sep 30. 2021

신 스무고개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집을 나서다가 현관까지도 못가서 돌아섰다. 스마트폰을 안챙긴 것이다. 설사 깜빡하고 길을 나섰더라도 버스정류장 미처 못가서거나 도착해서는 되돌아오긴 했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버스를 탈 수 없을테니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스마트폰을 대신하는 아주 작은 캡슐을 팔뚝에 삽입해 손바닥이 화면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딱히 그 정도가 아니어도 이미 스마트폰은 내장만 안됐을 뿐이지 내 몸의 일부분이 된 지 오래다.
이것이 없으면 차를 탈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다.음력으로 쇠는 선친의 기일을 빠트릴 수도 있고, 당장 내일 이후 스케쥴을 몰라 실수하기 십상이다. 네비가 없어 있는 곳이 어딘지 몇 번 버스를 타야할지 헤멜 것이고, 조금 복잡한 셈을 하게 되면 종이와 펜을 꺼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 안에서 단절되고 고립된 섬에 표류한 로빈손 크루스 신세를 못면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뉴욕에 온 부시맨이 되거나 세상 속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실이 있다.
스마트폰은 나의 지난 행적은 물론 계획까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 저장하고 있어 본인인 나보다 더 자세하고 소상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과장하자면 성범죄 전과자에게 채우는 전자발찌를 스스로 채우고 사는 셈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어떤 사람이 뉴스 방송에 뛰어들어 자신의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건이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스마트폰이 자신을 감시하고 소리까지 녹음한다고 소리칠 사람이 나타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간혹 섬뜩하고 기이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5G의 빠른 속도로 누군가의 전문적인 조작으로 지시를 받아 메모리칩에 내 평상시 대화를 다 녹음했을 수 있고, 카메라가 달렸으니 녹화를 하고 있는 수도 모른다.
내 은행구좌, 카드의 비밀번호까지 이 물건은 알고 있고 수틀리면 내가 이제껏 쓰고 기록해뒀던 일기며 메모까지 통째로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나도 알지 못하는 심장박동이며 수면시간, 하루 몇 걸음을 걸었는지도 알고있다. 한마디로 "스마트폰은 모든 걸 알고 있다"인 것이다.

폰의 지문인식이 없던 시기 잠시 비밀번호로 잠금설정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내가 폰을 잠시 빌려 쓸 일이 있어 풀어줬더니 지나가는 말로 "왜 잠궜어?"라고 했다. "그냥"이라고 퉁명스레 받았지만 괜시리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매번 쓸 때마다 잠금을 푸는 것도 번거롭게 여기던 참이라 아예 풀어 버렸다.
이내 사용자의 이런 불편을 눈치챈 영악하고 날랜 스마트폰 회사들이 패턴에 이어 지문인식, 홍채인식 기술까지 장착해버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전에 쓰던 4자리 비밀번호든, 고유한 내 지문이든, 이 물건의 허락없이는 접근할 수 없으니 엄밀하게 보자면 내 자의에 의해 작동되는 내 물건이 아닌 것이다.
녀석은 나의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판단과 결정까지 내리는 까다롭고 영특한 다른 객체인 것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해서 내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의 알람이나 스케쥴 기능은 내 요구를 수용한 결과지만 그때는 언제쯤 밥을 먹으라든지, 지금쯤은 무슨 일을 마쳤어야 했다든지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대로 끌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모든 걸 알고있고 모르는 것마저 아는 스마트폰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사실 하나가 있다. 나는 그리 특별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숱한 장삼이사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르긴해도 범죄에 연루되어 세인들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별스럽지 않은, 어쩌면 보잘 것 없다는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들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게는 자유롭고 편안한 심사가 우선이니 말이다.

한때 세상을 하찮게 내려보던 높은 양반의 스마트폰이 물 건너 다른 나라에 가서 잠금장치를 풀게 될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기껏 4자리 수에 불과한 비밀번호도 헛갈려서 해제를 거부당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무려 20자리 비밀번호를 설정한 그 사람의 속내가 궁금하긴 하다. 암기력도 좋지만 무척 숨길게 많고 중요한 인물인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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