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바베큐 먹으러 캠핑 가자고 한 모양이다. 게 눈 감추듯 고기들이 사라진다. 아들 녀석은 남 먼저 맥주캔을 따고 딸래미는 끝까지 꼬치를 고집한다.
처음으로 집 밖에서 추석을 나게 된다. 3박 일정으로 캠핑을 왔다. 큰 애가 중 3때 갔던 게 마지막 가족 캠핑이었으니 근 7년만이다.
텐트 치는 것부터 버벅거린다. 야외테이블, 침상 다 손에 익었던 것인데 그새 다 잊어버린 것이다 . 잠깐씩은 헤매다 조립하고서야 새삼 기억이 나니 매년 혼자라도 자주 다녀야겠다.
예전에는 내가 끌고다녔었는데 이번에는 아내와 애들이 가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20대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따라 다니는 게 흔하지 않다고 고마운 일이라고 반색한다. 우리집 아이들은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한다.
우리 식구는 팩키지여행이라고는 다녀보질 않았다. 애들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이 들어 국내든 해외든 배낭여행족이다. 이번 일정도 며칠 전 느닷없이 정해서 오게됐다.
첫번째 예약은 경북 청옥산 자연휴양림이었다. 그런데 망고를 데려가자고 해서 반려견 동반이 되는 검마산휴양림으로 수정을 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경북은 너무 멀다고 난색을 보인다.
캠핑은 산중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제 맛인데 할수없이 온 가족이 만족해야 하니 가까운 가평으로 왔다. 망고는 외박이 낯선지 딸래미 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괜찮은 입지다. 점심무렵 도착해서 집 2채를 지은 셈이다. 세간살이 조립까지 끝내고 나니 저녁시간이다. 어쩌다보니 하나 둘 갖춘게 지금은 없는 게 없다.
짐이 작은 살림집의 이사짐 수준이다. 텐트도 이너텐트와 리빙텐트로 큰 사이즈인데 타프까지 친다. 주방 셋트와 식탁, 조립형 평상, 에어매트까지. 그래서 우리는 예전부터 2박 이상이 아니면 캠핑을 안가는게 불문율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번엔 짐나르는 것부터 마무리까지 아들이 큰 몫을 했다. 키운 보람이 있다. 오랜만에 캠핑 나와서 낑낑대는 늙은 남편이 안스러웠는지 아내가 밥을 앉히고, 된장찌게까지 끓인다. 나는 숯을 피워 바베큐를 굽는다.
- 둘째날
캠핑 온 다음날 아침은 커피지. 집과 사무실에서도 귀찮아서 캡슐커피를 마시는데 굳이 나와서는 원두를 갈아 제대로 마신다. 이건 무슨 역설일까.
애들이 확실히 크긴 컸다. 예전에는 이너텐트 안에서 네 식구가 다 잤는데 이젠 둘 둘 나눠서 잔다.
내실(이너텐트)은 여성용. 남자 둘은 리빙텐트에서 불침번(?)을 서며 잔다. ^^
내일은 없다. 먹는게 남는 것. 그리고 불멍...
캠핑장으로 막내동생네가 찾아왔다. 애 셋에 치여사는 제수씨 휴식 준다고 꼬맹이 셋만 데리고 왔다. 얼음 채운 손바닥만한 대하 한 상자를 조공으로 받쳤다.
졸지에 자식이 다섯이다. 몇 판을 구워댔는지 모르겠다. 논에 물드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가. 흥부집이 이랬을거다.
- 세째날
추석을 끼고 캠핑을 갔다니 부럽다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마음이 싹 가시게 만들어 드리겠다.
3박4일중 마지막 2박동안 비가 왔다. 굳이 2박이라고 한 이유는 저녁부터 밤에 걸쳐 내린 비였기 때문이다. 이미 예보를 통해 알고 있긴 했었지만 특히 이틀째 밤에는 폭우였다.
나름 대비를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텐트를 때리는 비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즈음. 그러니까 <위플레쉬>에서 앤드류가 절정에 다다를 때 치는 드럼 소리가 꼭 그랬다. 후레쉬를 들고 텐트 밖으로 나가봤다.
헉...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타프(운동회때 귀빈석에 치는 그늘과 비를 막는 천막 같이 생긴 것) 아래 뒀던 조리테이블, 주방기구, 찬장, 냉장고, 식탁, 의자들 등등이.... 비를 쫄딱 맞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후레쉬를 천장에 비췄다. '이럴수가...' 타프가 방수가 안돼 비가 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래로 불룩 처진 부분이 물을 한가득 담고있다. 자칫하다간 아닌 밤중에 물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
아들을 깨웠다. 내실(텐트 안에 있는 또 작은 텐트. 이너 쉘, 이너텐트로 불림)에 잠든 모녀까지 깨우지 말고 부자가 처리하면 될 일이다. 젖어선 안될 집기들을 텐트안으로 집어넣고, 타프가 만들 물웅덩이에 물을 쏟아내고, 텐트 주변을 둘러보며 일일이 손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들더러 자라고 이르고선 텐트 안에는 젖은 데가 없는지 후레쉬를 비추며 다닌다.
"왜 비가 새는 것 같아?"
"깬거야?"
"아니 못자고 있었어 비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텐트밖에서 당신 후레쉬 빛도 들어오고.."
"타프가 새네. 혹시나 했는데..."
아내도 잠이 안들었나보다. 캥거루 새끼마냥 열린 텐트 지퍼의 아내 얼굴 밑으로 딸도 고개를 삐죽히 내민다.
"크게 걱정할 일 아냐. 다들 자. 혹시 안에 비 새는덴 없지?"
"없어"
"그럼.다들 자. 나도 한번 둘러보고 잘게"
다행히 텐트 안은 크게 이상이 없는데 바닥에 깐 방습포 밑을 들춰보니 물이 차 오르는게 물이 잘 안빠지는 것 같다. 대개의 오토 캠핑장은 쇄석을 깔아놓는데 물 빠짐이 좋다. 우리 텐트가 있는 구역에 구배가 안좋아서 그런가 보다.
텐트 천장을 보니 물 방울이 조금씩 맺힌 게 보인다. 역시 방수기능이 떨어져서 그렇다. 제일 문제는 아랫단에 물이 많이 비친다는 점이다. 아직은 걱정을 안할 정도인데 자칫 방습포 안으로 많이 떨어지면 배낭이 젖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온다. 밤새 텐트를 둘러보며 점검하느라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차피 편안히 잠들기는 어렵겠다 싶어서 자처한 일이기도 했다. 아침이 되자 비는 잦아들더니 어느새 그쳤다. 아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밤 샌 거야? "
"응. 그게 편할 것 같아서..."
"나도 제대로 못자긴 했어"
아내는 텐트안으로 들여넣은 집기들과 타프 아래 비를 맞힌 장비들을 둘러보더니
"아침을 어떡하지? 좀 정리하고 먹으면 늦을텐데...." 식사 걱정부터 한다.
어제 찾아온 동생네 식구들은 밤도 깊고 조카들이 좋아해서 하룻밤 캠핑장에 딸린 게스트룸에서 자고 있었다.
아침에 아내가 찌개로 식사 준비를 해서 같이 먹기로 했다.
"그냥 집으로 가다가 챙겨먹으라고 해야겠어. 정신없는데.... 내가 말하고 올게"
게스트룸으로 가보니 동생은 아이 셋을 다 씻기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밥은 집에 가다가 챙겨먹여야 겠다. 어젯밤에 비가 새서 텐트 안이 난장판이야"
"에헤. 알았어. 얼마나 샜는데?"
"뭐 좀... 난 못잤다. "
동생이 애들을 데리고 작별인사 한다고 텐트로 왔다.
"어떡해요. 애들 배고플텐데.....
"아입니더 형수님. 뭐 아침 될 만한거 사다드리고 갈까요?"
"괜찮아요. 정리하고 천천히 먹죠 뭐...."
"행님아. 내 텐트 엄마집에 갖다 놨는데 그거 형이 쓰면 안돼?"
"넌 캠핑도 안가는 데 그걸 왜 샀냐?" "홈쇼핑보다가 충동구매한거지 뭐. 산 지 몇 년 됐을걸.... 근데 박스도 안뜯은 거야 . 거 뭐더라...있잖아. 캠핑장비 만드는 유명회사 꺼"
"ㅇㅇㅇ?"
"응 . 맞아. 거기 꺼, 큰 건데 7~8인용인가. 비싸게 샀어. 그러게 내가 왜그랬을까"
"알았어. 생각해 볼게"
동생네가 떠나고 식구들과 대책회의를 했다. 집기들이야 닦아서 제 자리에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날도 비 예고가 있었다.
"지금은 비가 그쳤으니까 그냥 짐 챙겨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들의 안이다.
"근데 앞으로 얼마나 더 너희들 데리고 캠핑 오겠냐. 예정대로 아빠는 하루 더 있고 싶은데... 어떠냐?"
"네. 좋아요"
"근데 그럼 오늘 밤엔 어쩔꺼야. 타프도 텐트도 비가 새는데...." 아내가 보충질의를 한다.
"텐트는 거의 안새는데 내가 방심하고 원래는 방수천을 덧씌워야 하는데 안씌워서 그런거니까 타프 안에 텐트를 치면 2중이 돼서 괜찮을거야. 날 믿어. 근데 진짜 문제는 물빠짐이 안좋더라구. 그래서 사이트를 옮길 거야 저 위로..."
"다시 타프하고 텐트를 친다구? 짐도 옮기고?"
"내가 밤새 생각해 둔 수월한 방법이 있어. ... 이렇게 저렇게...... "
그렇게 사이트를 옮겨 타프와 텐트를 치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 해야 할 일을 정해주고 얘기를 마무리 하는데
"큰엄마!" 조금 전에 떠났던 큰조카가 뭘 들고 온다. "이거....."
동생이 돌아가다 만두를 사서 제일 큰 녀석 편으로 들려보냈다.
"아빠는? 주차장에 있니?" 내가 물었다.
"네"
"도련님도 참...그냥 가라니까... " 아내가 고마워한다. 평소 아내는 "같은 말을 해도 나는 당신보다 도련님이 더 정스럽고 유머가 있더라 "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이런 사태에도 아내는 황망해하지 않는다. 결혼 전 아내는 한번도 캠핑을 가보지 않은 아니 이후로도 꿈을 꾸지 않았을 사람이다.
아이들 어릴 때 아이들 핑계 대고 처음으로 캠핑을 갔다. 계곡이 좋은 산으로 떠났다. 자연 환경도 좋고 우리가족밖에 없어 좋은데 아내는 샤워는 물론 씻을 데도, 전기도 특히 화장실도 없는 낯선 환경에 질겁을 했다. 겁이 많아 밤에는 무서움도 많이 탔다.
그래서 절충점을 찾은 것이 지금의 오토캠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비박은 절대 따라 올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아내와 둘이서 떠난 캠핑장에서 태풍을 만나기도 했다. 하필 초보 캠퍼인 후배부부가 따라붙었는데 한밤중에 그 사단이 난 것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 폭우는 일도 아니긴 했다.
우리는 만두로 아침을 때우고 정비에 나섰다. 이제 아이들이 성인이라 제 몫을 톡톡히 한다. 아내는 이제 조립도, 해체도 베테랑이 됐다.
"관리를 잘해서 그렇지 . 이게 좀 오래되긴 했지... 여보 이 텐트 내가 언제 산거지?" 나는 내가 한 일도 오래된 기억은 아내에게 잘 묻는다.
아내의 셈법은 나보다 정확한데 이유는 애들 나이를 가늠해서 알아맞히기 때문이다. 늘 이런 식이다. "이거 ㅇㅇ이(아들) 5살 때 당신이 산 거잖아. 17년 정도 됐네. 오래 쓰긴 했다."
"야. 17년.... 비가 안새는 게 이상할뻔 했네... 타프는 천만 바꾸고, 텐트는 그냥 ㅇㅇ이(동생) 지꺼 쓰라고하니까 그걸로 바꿔야 겠다. 아깝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모녀는 시내로 부식을 사러 갔다. 장작을 좀 많이 사오라고 일렀다. 비가 내려서인지 날이 더욱 차가워졌다. 일찌감치 넉넉하게 불을 피우면서 우중 캠핑을 즐길 참이다.
아내가 푸짐하게 장을 봐왔다. 다들 안해도 될 고생을 한 날이다. 모름지기 일꾼은 잘 먹여야 원성을 안듣는다.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불을 피워 바베큐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넌 진짜 고기 잘 먹는다. 그렇게 맛있냐?" 내가 평소 고기를 좋아하는 아들더러 물었다.
"하도 고기 먹어본지 오래돼서...."녀석이 너스레를 떤다.
우리 대화를 지켜보던 딸이 바른 말을 한다. "이렇게 3일 연장 고기로 배를 채울 지는 몰랐네"
아내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오늘은 괜찮을까?"
"걱정마. 어제처럼 폭우가 쏟아졌으면 좋겠는걸. 이래 놨는데 비가 안오면 어쩌지?"
우리 대화를 듣던 딸이 또 한마디 거든다."아빠는 참 특이해"
그날 밤도 전날보다는 덜하지만 비가 많이 내렸다. 이너텐트를 없애고 넷이서 함께 잤다. 고된 하루를 보내서인지 다들 금방 잠이 들었다. 나 역시 잠들기 전 텐트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 단잠에 빠졌다. 안심이 되어서였다. 둘러보니 비가 제법 쏟아지는데도 걱정할 게 없었다.
- 마지막 날
캠핑장을 떠나오던 마지막 날 새벽 6시쯤. 아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비가 그쳤나보네. 또 내리기전에 짐을 챙기는게 낫지 않을까?"
"애들 더 재우고 꾸려. 이제 안쓸 텐트라서 좀 쉬울거야" 아내는 어제부터 마음이 급했다. 우리 둘 사이에서 잠든 두 녀석은 기척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비가 내렸다. 9시가 다되어서야 애들을 깨웠는데 때맞춰 빗줄기가 멈췄다.
"혹시 비올지 모르니까 어서 서둘러서..."
"여보 쫌... 어제부터 자꾸 왜그래. 좀 천천히...흡" 두번 같은 말이 반복되면 잔소리처럼 들려 화를 내는 내가 짜증섞힌 한 마디를 하려들자 아내가 검지로 내 입을 막는다.
그때까지 몰랐다. 이것이 처절한 복수극의 단초가 될 줄은...
심술궂은 구름이 갈 길을 재촉하니 햇볓이 내려쬔다. 아침은 가져온 빵과 간단한 요기로 해결하고 장비들을 말려가며 쉬엄쉬엄 챙겼더니 12시가 다됐다.
점심은 이동하다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딸에게 주변 식당 검색을 시켰더니 다섯군데를 물색해서 가족톡방에 띄웠다. 닭볶음탕, 막국수, 닭갈비...
회식자리에서 부장이 자장면을 선언하듯 먼저 말했다. "아빠는 닭갈비"
아들은 "막국수도 괜찮겠네"
"아빠는 닭갈비인데 다른 사람은?"
"아빠 닭갈비집에 막국수도 팔거든요 저는 좋다는 뜻이었어요"
머쓱해졌다. "아니 투표로 정할건가 해서...."
아내는 역시 현명하다. "위치를 보고 가는 방향인 데로 정해"
캠핑장을 나와 네비를 켰는데 오락가락 오른쪽으로 가면 되돌아가라고 나오고 다시 방향을 틀면 다시 유턴을 하라고 한다.
아들이 "엄마. 잠깐만요. 제가 앱으로 볼게요" 하더니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다는 걸 알려준다.
내가 왼쪽으로 가자고 했다. 오르막인 그 방향으로 가면 호명호수가 나온다. 우리는 3일을 묵으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특색있게 지어진 근사한 카페에 감탄을 연발하고 차는 호수 유원지를 돌아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마주오는 싸이클 동호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들에게 오르막이라 속도가 느리다.
"엄마 저 사람들 허벅지 봤어요 둘로 나눠진 것처럼.... 우와~" 아들의 말에 아내는 "응. 싸이클 타는 사람들이 다 저렇더라. 엄마가 아는 싸이클 동호회 사람들도 다..." 허벅지 근육이 하나로 통일된 아비는 다시 한번 주눅이 든다.
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망고를 안고 편안히 주무신다.
또 한참 풍광을 만끽하며 가는데 아들이 외친다.
"어... 여기 낯익은 풍경인데? 엄마 잠깐 멈춰보세요." 그리고는 한참 네비를 검색하더니 다시 탔다. "조금만 더 가면 그때 그 펜션이 나올것 같아요"
'그 펜션'이란 작년 여름방학에 아들이 친구와 다녀왔던 펜션이다. 집에 돌아온 지 며칠도 지나지않아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친절했던 주인 모녀와 손자 일가족 모두가 절명했던 기사로도 크게 났던 사고현장이다. 당시 아들이 한동안 충격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조금 더 가다가 차를 멈추게 한 아들이 내린다. 나도 따라서 내렸다.
"아빠 저기 3층에 제가 묵었었구요. 여기 이 자리에 관리실 겸 사장님이 사셨어요."
아래쪽은 축석해서 정비를 했는데 아직 위쪽 산 한쪽이 허물어져 있다. 길가에 누군가 가져다놓은 꽃 한다발이 놓여져 있다.
녀석은 거기까지 말을 하곤 말없이 시선과 발걸음을 돌려 반대편 산 아래를 내려다 본다.
"ㅇㅇ아 이제 그만 가자" 아내가 아들을 부른다.
다시 차안. "그때 ㅇㅇ하고 ㅇㅇ하고 갔었지?"
"네."
"8월이었지 아마..."
"그랬던것 같아요"
"마음이 아팠겠다. 너 그때 충격 먹었었잖아. 안됐어 그 분들..." 아내가 일부러 말을 붙이는 것도 같았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멀리 보이는 한 건물을 가리키며 "너 저기서 수상스키했다고 하지 않았니?"
"네. 맞아요 저 '빠지'에서..."
내가 불쑥 끼어든다. "빠지... 왠 빠지? 빠지가 뭐야?"
아내가 아들 대신 내 말을 받는다. "얘들은 강 위에 저걸 '빠지'라고 불러. 왜 있잖아 '바지선'할 때 그 '바지'"
"아... 바지..빠지...." 물색없고 신세대 언어를 모르는 아비는 연타에 그로기 상태에 이른다.
그래도 딱 거기까지는 견딜만 했다.
"그런데 ㅇㅇ아 너 '심혜진'이라는 배우 아니?"
"아뇨"
애비 심사야 어찌됐건 모자간의 대화가 다시 이어진다.
"옛날 콜라CF로 뜬 여배운데... 최근에 그 배우 집을 한번 봤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저기처럼 강변이 쫘악 펼쳐지고 잔디에 멋진 건물이며......."
다시 내가 끼어든다. "거기가 어딘데?"
"검색해봐. 당신 그거 잘하잖아. 아무튼 ㅇㅇ아 그래서...어쩌고 저쩌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던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3000평이라네...."
"아마 그 정도 되지 않겠어"
"부자와 재혼한거구나..." 내가 들어도 저급한 시샘 내지는 자격지심의 발로다.
"그랬었나? 뭐 아무렴 어때. 어쨌거나 거기에....미주알 고주알..."
마침내 물색없고 시대 트랜드에 뒤쳐졌으며 옹졸한 모습까지 보인 애비는 그로기 상태까지 몰린 끝에 여배우와 관련된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맞고 의문의 K.O패를 당하고 만다.
혼절한 선수에게 물을 꺼얹으려는듯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에 도착했다. 망고 때문에 부자, 모녀 두명씩 돌아가며 식사를 하기로 했다. 부자가 먼저 먹기로 했다. 나는 정신도 차리고 쓰린 속도 달랠 겸 잣막걸리를 시켰다.
막걸리가 완전 '잣맛'이다.
뒤이어 우리와 교체된 모녀가 메뉴를 정하자 의문의 연패를 당한 내가 계산을 마치고 나온다. '패자의 최후는 이렇듯 비참한 것인가' 애써 눈물을 삼키며(?) 차에서 기다리는데 식사를 끝낸 왠지 어깨가 펴진듯한 아내와 딸이 차에 오른다.
집에 도착해 베란다 창고에 짐정리를 끝내니 다들 샤워를 끝냈다. 아내는 피곤해서 저녁 선약도 취소했다고 했다. 아내는 벌써 잠이 들었다. 쓰고있던 안경을 벗겨주니 잠꼬대처럼
"음... 세탁기 돌려놨는데.....당신 빨래 좀 널어줄래.... 도저히 못일어나겠어"
나는 말없이 세탁기로 향한다. 캠핑을 다녀온 빨래감이 엄청나다. 반쯤 널고 있는데 거실을 가로지르는 만만한 아들이 내 레이다에 잡혔다.
"너 세탁기에 남은 빨래 좀 이리 가져와 ( '니 죄도 있어 이 눔아....')"
"네. 근데 저 스파케티 사와서 만들어 먹을건데 드실래요"
"와 도대체 니 뱃속에는 뭐가 들었냐? 아니 저녁을 그만큼 먹고 또..."
"2인분 재료인데..."
"아빤 배 불러. 너 아빠한테 요리 부탁하고 싶은 거지?"
"히히 네. 아빠가 해주시는 게 훨 맛있어요"
"아빠 이거 널고 반신욕해야 돼. 너도 자꾸 해봐야 늘어. 레시피대로 만들어봐 (그래야 구박 덜받아. 3000평 집 못사줘도...)"
"네"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SNS를 뒤지면서 반신욕을 마치고 나오니 10시가 넘었다. 그동안 못썼던 글을 일기처럼 남기고 잠자리에 드니 새벽 2시가 다됐다.
마침내 3박4일의 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잠이 들었다. 비도 내리지 않는 편안한 숙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