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더니 코로나 시국에 노인을 위한 피난처 역시 없다.
어머니는 일상이었던 노래 교실을 갈 수 없게 됐고, 동창들과의 식사모임도 삼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봉산이 코 앞에 펼쳐진 고모네에서 한동안 지내시게 된 것을 내심 반겼다.
이미 오래 전 혼자 되신 고모는 늘 손위 올캐이자 당신보다 한 살 아래인 어머니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심정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의지하신다. 아무래도 5남5녀 중 아들로서는 막내이자 9번째였던 아버지와 10번째 막내딸였던 고모간의 각별한 유대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한량이자 반백수였던 고모부를 대신해 평생 직장을 다니며 가장 노릇을 했던 고모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으며 정스럽다. 아마 그런 낙관적인 성격이 고달팠던 지난 날을 견디게 해줬으리라.
추석에 뵌 어머니는 추석 명절을 맞아 잠시 돌아갔다 금방 다시 오마고 한 고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 요량인 것 같았다.
두런두런 대화 끝에 고모네 이야기가 나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카드만 늬 고모는 이제 여한이 없긋다. 하도 정이(고모네 딸)가 지 집에 가자캐서 가봤디만….”
정이는 고모 장녀로 내게는 한 살 위 고종사촌 누나가 된다. 곤궁한 살림에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매형과 결혼해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뭐라카드라 펜트하우스라 카디만… 한 백평은 훨씬 넘지싶더라… 하이고매 내사 드라마에서만 봤지. 그런 집은…. 얼마라 카드라? 암만 캐도 나영이캉 소영이(누나의 두 딸) 치울 때꺼정은 그기 살라능가 싶더라…”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꼬랑지에 붙은 한마디가 내 폐부를 쑤셨다.
“그란데 우째 느그들은….”
누나는 일찍이 부동산에 재미를 봐서 실패없이 재산을 늘려나갔고 지금은 몇십억을 호가하는 대단지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산다.
“느그들은…”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생략된 말을 익히 아는 나로서는 괜스레 죄송스럽고 민망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눈쌀 찌푸리게 하는 막장 드라마를 통해 더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낯선 용어가 아닌 ‘펜트 하우스(Penthouse)는 아파트나 호텔등의 주거용 건물 최고층에 위치한 고급 주거 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플레이 보이’지를 능가하는 높은 수위의 도색잡지 이름이 ‘펜트하우스’였던 걸 봐도 호사스런 생활 공간임을 능히 짐작케 한다.
직업적으로 펜트하우스를 자주 접했던 나와는 달리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드라마에서나 예능 프로를 통해 이제는 누구나 그 규모나 내용을 알 수 있게 됐다.
매일 사무실 출근을 하며 보게 되는 역세권의 주상복합건물의 최상층도 펜트하우스다.
단독 엘리베이터가 따로 설치되어있는데 이런 사정까지 감안하면 설사 내게 주어진대도 내 수입을 감안하면 관리비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최상층 그리고 넓은 면적이라면 나 역시 펜트하우스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살아 본 적은 있다.
비록 전세였지만 60평형대의 25층 최상층에 살았던 적이 있다. 관리비가 많이 나와서인지 30평 대 아파트와 전세값 차이가 별반 나지 않아 호기롭게 2년을 살았다. 높은 고도인만큼 탁트인 전망과 안방에서 아이들을 불러도 잘들리지 않아 폰을 써야했다. 그래서 더 풍요롭고 따뜻했다는 기억은 없다. 서향인데 전망을 가리는 게 없어 노을을 좋아하는 아내가 저녁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고, 방 하나는 온전히 창고 대신으로 쓸 수 있었다는 정도다.
넓고 화려한 집은 그만큼의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집은 쓸고 닦고 조이며 사람과 함께 늙어갈 때 정이 들고 생명이 깃들어 숨을 쉬는 게 분명하다. 덩거러니 집과 사람이 따로 놀면 집은 죽은 것이다. 나는 그런 집을 적잖히 봐왔다.
마술처럼 그 많던 짐들이 지금 살고 있는 30평형대 아파트의 어딘가로 다 스며들었다.
버린 짐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더 늘었는데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 식구도 늘었다. 반려견 망고가 방 하나는 아니지만 차지하는 면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가난했던 선친의 10남매는 각자 결혼해서 독립할 때까지 한 방에서 지냈다고 했다.
밤이 이슥해서 공부한다고 앉은뱅이 책상에 불이라도 켜면 형과 누나들에게 구박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헛간이었다. 창문도 없이 구멍만 뚫린 멍석 깔린 헛간에서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 당신 슬하의 삼남매중 유일하게 나만이 그 헛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옹색한 집이었지만 제법 넓은 마당을 가졌었는데 장손인 사촌형이 2층 양옥으로 올리고 난 후 마당은 쪼그라들고 그렇다고 딱히 실내가 커졌다는 느낌도 없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던 감나무를 베어버린 것이 늘 서운하고 아쉬웠다. 내가 늘 타고 오르며 놀았었는데 단단하지 못한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얼굴이 긁혀 온 얼굴에 빨간 약을 바르고 다녔었다.
그 감나무를 베어내고도 좁게만 느껴지는 선친의 옛집터이라니. 이런 때 사람의 기억은 정성적이어서 그다지 믿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고향집은 고작 22평이다. 마당까지 포함한 땅 면적이 그렇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선친이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다.
마루에 앉아 이전 주인에게 신문지에 싼 돈뭉치를 건네주던 아버지의 손이 떨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구입대금은 300만원이었던 같다.
지금도 작은 마당과 수돗가 그리고 보일럿실, 화단이 있다. 이전에는 일본식 관사였는데 내가 제대할 즈음에 새로 지은 집이다. 그곳에서 우리 삼남매까지 다섯 식구가 살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허름한 관사였을 때 반은 세를 놨었다는 것이다. 마당 하나를 같이 쓰는 두 세대가 살았다. 벽 하나를 맞대고 방 두 칸씩에 부엌 하나씩을 쓰는 한지붕 두 가족.
세를 살던 철현이네는 아들 형제였다. 그러니 22평짜리 관사에 총 9명이 살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마당에는 선친이 매년 키우시던 국화 화분들로 가득했었다.
어린 우리들은 마당에서 뛰어놀다 호빵만큼 부풀어 오른 국화꽃대를 꺾어버려 혼이 나곤 했었다.
지금 고향집을 찾아가 봐도 그 사실이 잘 믿기질 않는다. ‘여기에서 두 세대 아홉식구가 뒹굴었다니.’ 그런데 좁은 줄도 부족한 줄도 몰랐다.
철현이네가 집을 사서 이사한 이후 그 방 중 하나는 내 차지가 됐는데 고등학교 때 일이다. 너무 좋아서 한동안은 그 방에서 꼼지락거리느라 바깥 출입도 잘 안했다.
이후로 나 역시 가정을 꾸리고 수없이 이사를 하며 언제나 내 방을 가지게 되면서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다.
고향에 갈 때마다 뛰어놀던 옛 초등학교에 가보곤 하는데 그렇게 넓어 보였던 운동장과 교사가 너무 왜소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사람의 기억은 정량적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펜트하우스는 우리말로 ‘하늘채’라고 한다. 하늘과 가깝다는 뜻일거다.
고대에도 아파트처럼 고층 주거시설이 있었다. '사막의 맨하탄'으로 불리는 예멘의 시밤이라는 지역에 있다. <사진 참조>
16세기에 지어졌는데 지금의 고층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콘크리트가 없었으니 흙과 돌을 쌓아 만들었다. 고작 30년이면 허무는 지금의 아파트와 달리 500년 넘게 쓰이고 있으니 놀라운 축조 기술이다.
그런데 현대의 아파트와 다른 것이 있다면 아래층일수록 더 비싸고 좋았으며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살았다는 점이다. 당시로는 상수도 시설이 미흡했으니 물을 길어다 쓰기 힘들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니 계단으로 오르내리기 힘들어서였다.
모르긴해도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신의 영역이고 땅이 인간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땅을 딛고 사는 삶이 더 인간답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는 현대 주거의 혁명을 이뤄놨다. 두레박에 사람을 싣고 허공에 풀어놓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딛고 있는 바닥은 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인지 최고층에는 넓고 화려한 펜트하우스를 지어야만 하는 지도 모른다. 왠지 모를 공허함, 무엇으로든 화려하게 치장하고, 정원에 화초를 심고, 풀(pool)을 만들어 물을 채워 놓고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 때문일 수도 있다.
펜트하우스라는 공간의 위세에 사람이 건물의 한 부속처럼 느껴지거나 까닭없는 허전함이 느껴진다면 공중에 떠 있어서 혹은 언제가는 가게 될 하늘에 좀 더 가깝게 있어서 느끼는 불안함 때문이 아닐까.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공중정원의 가둬진 나무처럼 콘크리트 박스에 담겨져 하늘 높이 매달려 사는 걸 부러워하지는 말아야 겠다.
이렇게 정신승리를 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