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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Oct 09. 2021

트렌치 코트

잿빛 하늘만큼이나 음울한 하루였다. 오후 늦게 걸려 온 세무서의 전화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초가을 비뿌리는 퇴근 무렵의 도심이란 차 바퀴에 시달리다 먼지를 둘러 쓴 채 인도 쪽으로 밀쳐진 지난 밤 내린 눈처럼 초라하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굵어졌다를 반복한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와이퍼는 메트로놈처럼 장단을 맞춘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은 바다물처럼 물때를 기다리며 파도 거품 같은 흰 증기를 꽁지에서 내뿜고 있다.

이윽고 신호등에 선명한 화살표가 켜졌다. ‘이번 신호에 건너갈 수 있을까’
그제서야 딱히 서둘러 퇴근할 이유도 저녁 약속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천천히 떠밀리듯 사거리를 지난다.
늦은 퇴근길의 버스 정류장은 명절날 시골 목욕탕처럼 복작되고 부산스럽다. 강변도로를 낀 양화대교 북단은 시외와 강남으로 갈리는 교차로로 진입하려는 버스와 택시들이 서로 먼저 머리를 들이미는 통에 뒤엉켜 있기 예사였다.
게다가 장마의 끝물처럼 그칠 기미가 안보이는 비로 모두가 젖어 있을대로 젖어있다.

굼뜬 몸동작이 기다리던 버스와 모자에 불이 켜진 택시로 달려 들 때만 잽싸다. 그마저도 한 손에 든 우산이 걸리적거린다.
이런 날은 괜시리 등이 펴지고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갑자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하지만 안될 말이다. 그의 차는 외산 고급 SUV다. 사고가 난 차라서 싸게 구입한 중고지만 두고두고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온 그가 아닌가. 담배 냄새가 배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서가는 서너대 차량이 비추는 헤드라이트에 누군가 튀어나오게 보인다. 착각이었다. 그녀의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가 정류장 인파 중에서 유달리 눈에 들어온 것일 뿐이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을씨년스럽긴 했지만 아직 트렌치 코트를 입기엔 이른 날씨였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그날의 해프닝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유도 의도도 없이 마치 엑설레이터를 밟지도 않았는데 돌진해버린 자동차의 급발진처럼....
그는 천천히 하지만 차분하게 그녀 가까이 자동차를 가져다 댄다. 차창을 내리고 그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타세요”
그제서야 다른 곳을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그의 자동차 그리고 차창 깊숙히 고개를 내민 그를 향한다.
“네?”
“타시라구요”

잠시의  침묵을 깨트린 건 그의 차 꽁무니을 물고 있던 버스의 경적소리였다. 주저하던 그녀가 자동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세요?”
“아 네… 부천….”
“네. 같은 방향이시네요.” 거짓말이었다. 딱히 작정하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 느닷없이 모르던 사람을 태운 자신의 행동을 설득하려는 말일 수도, 그런 자신의 자동차에 타게 된 그녀에 대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차는 그가 애초에 가고 있었어야 할 강변도로를 발 아래에 두고 벌써 양화대로를 건너고 있었다.
차 안은 그녀의 트렌치 코트 끝자락과 우산 꼭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인지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어색한 침묵을 대신하고 있었다. 앞 유리창 가에서부터 서서히 곰팡이처럼 번지는 습기를 없애려고 에어컨을 켜려던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차라리 차창을 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둠이 짙어지자 빗줄기는 차츰 가늘어졌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동안 조수석 차창으로 빗물이 들어오진 않을까 눈으로만 옆을 보던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갸늠한 턱 선과 하얀 피부, 속눈썹을 붙이지 않은 게 분명한 쌍꺼풀 없는 가는 눈이 평범해 보였을 그녀를 오히려 묘하게 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서른은 넘겼을 것 같은데 나이는 종잡을 수 없다.
눈길을 돌리다 걸린 무릎 사이에  가지런히 포갠 그녀의 손은 한 손이 다른 손을 살짝 힘을 줘서 붙들고 있다.
유난히 길고 가는 손이다. 그는 그녀의 손을 보면서 문득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집으로? 아니면 약속장소로 가려던 참일까? 아니다. 약속장소를 가면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차는 어느덧 경인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평소처럼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멈췄다 출발하기를 거듭하지는 않아도 될 그러니까 드라이브 삼아 운전하기는 괜찮을 정도다. 침묵의 공기를 흐트려 뜨리려는 듯 그가 말을 건넨다.
“이런 날…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에는 무슨 생각이 드세요?”
“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지만 그의 시선은 정면에만 꽂혀있다.
“무슨 생각이 드시냐구요. 이런 날씨의 저녁이라면…..”
“아. 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듯 말을 잇는다.
“저는 이런 우중충하고 무거운 날에는 낯 모르는 묘령의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그렇게 헤어지는 상상….”  

그녀는 이번에는 짧은 대답마저도 하지 않는다. 무례하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위험을 감지하고 움츠려든 것일까.
잠시잠깐 후회할 말을 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보면 그는 그녀의 정확한 행선지를 묻지도, 그녀 역시 어디로 가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그녀가 차에 타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 참….부천 어디로 가신다고 하셨죠?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시면….”
“이미 지나친 것 같은데요. 저번 톨게이트에서 빠졌어야 했는데…..”
“그랬군요. 다음에 빠져서 돌아가면 될 겁니다. 주소를 알려주시면…. 근방에 큰 건물이라도…."
“아뇨… 이대로 그냥 가셔도 될 것 같아요. 바람을 좀 쐬고 싶어졌어요. 괜찮으시면요…..”
그제서야 이제껏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던 그가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는 차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을 조금 내려도 될까요? 바람을 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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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을 한번 써볼까? 아서라 언감생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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