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탕이다. 북어국도 복어탕도 아닌 북어탕. 당연히 북어가 주재료다. 익숙한듯 생소한 이름이다.
이 집의 레시피는 독특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북어를 미리 쪄둔다. 촉촉해진 북어를 육수에 다진 파, 두부와 끓여내면 끝이다. 그런데 다른 데서 맛보지 못하는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오래전 포장을 했던 적이 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라면스프 비슷한 분말가루를 주는 것이었다. 맹물에 풀면 육수가 된다고 했다. 내심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온갖 재료를 조합해서 12시간 졸이는 그런 달인의 비법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건 없다.
그래도 머리카락마다 모공이란 모공은 다 열리고 땀이 솟는 그 기분은 어디다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꼽는 해장메뉴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이 레시피는 능곡 시장골목 안 허름한 식당에서 비롯됐다. 쇠퇴해서 몰락해가는 거의 시장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골목 안 상가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식당이다.
간판도 색이 바랜데다 실내 역시 오래되고 그리 청결하지도 않다. 삐걱되고 녹슨 낡은 철제의자만큼이나 연세 드신 할머니가 주인이다. 그 식당을 드나든지도 20년이 다 되어간다.
할머니는 퉁명스러운데다 사뭇 전투적인 분이다.
육수 추가를 부탁하면 "고기도 다 먹었구만 뭔 육수여?" 라고 하거나 허술한 밑반찬이라도 남기기라도 하면 "맨날 남기는데 왜 많이 담았어?" 주방에 대고 큰 소리치기 일쑤다.
꾸부정한 허리에다 얼굴 가득 패인 주름은 지난한 세월을 말해줄 뿐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당을 드나들며 손님(아마도 처음 찾은 듯한)과 크게 말다툼 하는 걸 두어번 본 적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머니의 퉁을 넉살좋게 받아넘기며 그 집을 단골로 자주 찾아다녔다. 나중에는 아무 말 없이 육수나 공기밥을 건네시면 '편찮으신가?'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 전혀 생기지 않을 것 같던 분점이 중심 상권에 생겼다. 아무래도 자식에게 내어 준게 분명할 것이다. 비지니스로 그 할머니와 대화를 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후로 개운한 해장국이 생각나면 이렇게 집에서 가까운 분점으로 온다. 젊은 주인(실은 직원인지도 모른다)은 친절하다. 하이톤의 싹싹하고 젊은 여자다. 실내분위기도 제법 깔끔하다. 얼마전부터는 식탁마다 전기레인지를 쓴다. 휴대용 가스렌지에 올려진 찌그러진 알미늄 냄비만 보던 나로서는 분식집 라면에서 이태리식당 스파게티로 승격한 기분이다. 좋다거나 반가운 기분과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옆 테이블 손님이 주문을 하며 밑반찬으로 나오는 계란말이를 좀 더 달라고 부탁한다.
젊은 주인은 흔쾌히 그러마 대답하고는 주방에다 외친다.
"ㅇ번 테이블... 계란말이 많이 나오시께요"
'엥 계란말이가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건가? 연세드신 노계가 낳은 계란인가?'
친절도 존대도 과하거나 잘못 쓰면 흉하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하지 않던가.
손님은 왕이라는 말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듯 식당 서빙과 같은 근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업무를 '감정노동'이라 부른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이나 말과 행동 그리고 얼굴에 드러나는 표현은 인간으로서는 통제하기 힘든 기제다. 보통사람으로서는 감추기 어렵고 속과 겉을 달리 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처럼 구체적인 매뉴얼이나 상호간의 지침 혹은 약속없이 관념적인 ‘친절’과 ‘성심,성의’ ‘진심’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보니 ‘연로한 계란말이가 스스로 걸어나오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차라리 작은 메모지라도 들고가서 손님의 주문을 받으며 “반찬 추가하실 것이 더 있으십니까?” 묻고 “계란말이 양을 더 늘려달란 말씀이시죠? …. 계란말이 많이….” 이렇게 써서 조용히 주방에 전달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배달을 시킨 중국집에 채근 전화를 하면 항상 “지금 출발합니다”라고 한다. 또 전화 하면 “막 출발했습니다”라고 한다. 아마도 채근을 하든 안하든 도착하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고. 단무지를 더 주문하든 안하든 랩 씌워 쌓아둔 한 접시 그대로를 가져 올 것이다. 물론 기억력 좋은 주인이나 단골집이라면 단무지 한 접시를 더 가져오긴 하겠지만. 그래서 계란많이가 많이 ‘나오셨는지’는 유심히 보지 않았다.
허름하고 불친절하며 오래된 본점, 깔끔하고 친절하며 새로 생긴 분점.
그리고 손님을 귀찮아하는 불손한 늙은 주인, 손님을 반기고 너무 공손한 젊은 주인. 우리는 양 극단을 꺼려하며 그 사이 마음 편한 지점에 머물기를 원한다.
중앙, 중심, 균형점, 중용, 중도 모두가 바라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이를 실천하고 살기란 무척 어렵다. 역사상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조차 완벽히 실천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다.
흔히 회색은 흰색과 검정색이 반반쯤 섞인 색인줄 오해한다.
천만에 흰 페인트 한 말에 검정색 한 컵이면 우리가 자주 보는 회색(grey)이 된다. 흰색과 검정을 반반쯤 섞으면 약간 밝은 검정, 먹색처럼 나올 것이다. 멀리서보면 검정과 분별이 어렵다.
사업을 시작한 후 한동안 아내에게서
“당신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인데 싫고 좋은 것이 뚜렷해서 걱정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투명하리만큼 다 드러난다. 흑백이 너무 뚜렷한데 회색분자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란 충고와 비슷한 내용의 조언을 수없이 들었었다.
이제는 포기한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회색은 백색에 훨씬 가깝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아마 전자가 유력하지 싶다.
중도가 중용와 혼용해서 혹은 잘못 쓰이거나 중도층이 마치 지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의 포지션처럼 느끼게 하는 말과 기사는 왠지 불쾌하다.
중도층에 해답이 있다고 떠드는 정치 기사를 대하면 역겹기까지 하다. 그 기사를 쓴 기자와 언론사의 포지션에 따라 중간지점은 늘 변하기 때문이고 그 잣대도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 중도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한 이상적인 중도층이 존재한다면 이는 이미 우리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사회가 말하는 중도층은 그저 우왕좌왕 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이도저도 불만인 사람들의 집합체다. 우리는 누구나 평평하지 않은 움푹 패인 두 발바닥으로 바늘 끝에 서 있을 수 없다.
어쨌거나 회색은 백색이 훨씬 많이 섞인 색이다. 나는 베이지빛이 살짝 도는 따뜻한 회색(warm grey)을 좋아한다. 웜 그레이에는 노란색과 빨간색도 미미하게나마 가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