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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Nov 13. 2021

국수 한그릇

이른 점심을 국수로 떼웠다. 주말이면 더 붐벼서 한참 줄을 서야 하는 집이다.
싸이클 동호회들이 몰려드는 행주산성 입구의 국수집. 비슷한 상호에 넓은 주차장이 딸린 국수집만 해도 대여섯군데가 되는데 손님은 빈익빈 부익부다. 20년 넘게 오갔으니 나머지 국수집들도 한번씩은 들렀다. 줄이 너무 길어서 혹은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랬다.

내심 잔치국수 레시피가 거기서 거기일텐데 별 차이 없으려니 찾았다가 매번 실패를 경험했다.
다르다. 우선 육수맛이 다르고, 다진 파 양념까지 차이가 난다. 대개 같은 메뉴로 한 지역에 몰려있는 오래된 식당가의 음식 맛은 비슷해지기 마련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이 종업원의 교류와 빈번한 정보교류다. 좀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서 원조집에서 주방장을 스카우트 하기도 하고 직원을 데려온다. 레시피나 재료 납품처까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투입량이 적은 특별한 소스가 핵심인 음식이 아니고서는 비밀 유지가 힘든 것이다.
그런데 잔치국수란 것이 육수를 내고 국수를 삼고 양념장을 얹는 비교적 간단한 것인데 이렇게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흥미롭고 의아스럽다.

대기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앞에 헬멧과 싸이클 레깅스 차림의 한 여성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키가 작은 편이라 화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야당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sns글이었다. 선그라스까지 끼고 있어서 그때까지 나이를 가늠하지 못했는데 연세가 많은 분이었다. 대기줄이 줄어들 즈음 어디선가 남편되는 이가 나타났는데 짐작대로 60대로 보였다. 나란히 서서 그 후보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흘려들어 내용은 알지 못한다.

보수 성향의 시부모를 설득 중인 며느리 되는 분의 글을 자주 읽게 된다. 자주라는 말은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의미다.
어르신 심기를 너무 거스리지 않으면서 쉽고 확실한 사안으로 차근차근 다가가려는 며느리의 진지한 노력이 사뭇 대견하면서도 서글프다.
대견하다는 말은 그런 접근이 가능할 정도로 평소에 신임을 받고 있고, 확고한 소신과 합리성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분이라는 심증이 간다는 말이다. 서글프다는 감정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흔하게 회자되는 세대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사고와 인식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면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정신과 사고체계를 가진 부모세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혹은 하려고 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나는 과연 확고한 신념과 논리로 무장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는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신뢰와 인내심을 겸비했는가.
그리고 나의 소신과 판단은 정확한 정보와 폭넓은 지적 산물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물음에 자신있게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의 내 결론이고 앞으로 개선되리라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는 몇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선 인간은 왜곡된 인식 체계다. 내가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순수한 그 자체이거나 본연 그대로인 것이 없다. 내가 보는 것은 1/5초 뒤에 벌어지는 상황이고 색깔조차 보는 사람마다 다른데 한가지 색으로 말할 뿐이다. 듣는 것은 내장된 경험과 기억으로 경중을 따지고 선별한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버릴 것과 저장할 것을 따로 저장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지식과 정보 그리고 현상은 누락되거나 걸러진 것, 진행 중인 것인 대부분이어서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두번째 나는 나의 사유조차 믿을 수 없다. 사유란 것이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감각과 생각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이는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뇌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전하고 검증 가능한 선택을 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고 위험을 회피해서 나를 보호하려고 한다. 설사 진취적인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예측 가능한 수준 혹은 예상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한으로 감안해서 선택한 결과일 게 분명하다.  
세번째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부실한 생명체라서 나 이외의 존재를 명확히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동일한 경험과 인식,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남의 생각과 행동을 섣불리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려 드는 것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국수 육수 하나에도 남이 흉내내기 힘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데이터와 정량적 수치로 나타내고 기록할 수 있느냐고 하면 나는 회의적이다.
하물며 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결과를 나는 감히 예상할 수 없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감정을 배제한 이성과 불편부당한 합리적 사고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세계 역사는 그다지 참혹스럽거나 이해하기 힘든 기록으로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100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수명을 감안할 때 내가 머무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유구한 역사책의 한 줄로 기록되는 시대를 살다 가는 존재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극히 미미하겠지만 그조차 하지 않는다면 내가 인정하는 내 삶조차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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