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Nov 13. 2021

각양각색

울릉도

“이게 뭐하는 거야. 응? 온 종일 걸리겠네. 온종일...내 참 이따위로….” 내가 서있던 대기줄 한 사람 앞에 있던 환갑은 지났을 것 같은 파마머리 사내가 항의를 했다. 아니 항의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고함이다. 상대는 우리 딸 또래의 어린 매표소 직원이었다.

크루즈선 선착장은 영일만 신항이다. 기존의 페리호가 출발하는 저동항이 아니다. 승객을 태운 셔틀버스는 신항 터미널 매표소 건물 앞에 잠시 정차를 한다. 예약을 하고 승선권을 끊지 않은 사람은 이 곳에서 표를 구입해야 한다. 터미널과 선착장이 멀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선착장에도 매표소가 있기는 하지만 붐비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 것 같았다.
“그럼 좌석에 가방을 두고 다녀와도 됩니까?” “네”
매표창구는 2군데가 열려 있다. 금방 긴 줄이 늘어섰다. 이미 셔틀버스를 탈 때부터 예견되던 상황이다. 버스는 제 시간보다 10여분 일찍 왔다. 승강문이 열리더니 기사가 “만차가 돼서 못탑니다. 좀 더 기다리시면 곧 뒷차가 옵니다” 안내만 하고 이내 출발해버렸다. 나는 승객이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20분쯤 후에 다시 버스가 왔다.

매표 진행 상황이 더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직원의 탓은 아니다. 예약을 한 사람, 현장구입을 하는 사람이 다 섞여 있다. 게다가 연세 드신 분에게 안내까지 해야하니 더딜 수 밖에 없다. 마침내 그 사내의 차례가 됐다. “6218번”
“어서 오세요. 예약하신 건가요? “
“아니. 아니 했을 걸. 6218번이라는던데….”
“잠깐만요...그 자리는 이미 찼는데요?”
“그래? 어…”
그 사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 6218번 아니야? 예약해둔게 아닌건가? 그 자리는 없다는데….?  어… 어… 그래. 내 참 한참을 기다렸다니까… “
통화가 길어진다. 바로 내 앞에 서있던 또 다른 중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이구. 참 언제 표 끊고 타려고… 지가 더 시간 걸리는구만. ”
마침내 파마머리가 전화를 끊었다.
“6218번은 예약 안한거라는데… 그럼 다른 걸 줘”
“네 그럼 몇 인용 객실로? ….  아 네 그럼…인(in)과 씨(sea) 어디로….”
또 두 사람 간의 설문이 이어진다.

파마머리 뒷통수를 한대 갈기고 싶어진다. 욱하고 발동이 걸리려는 것이다. ‘아니야. 참아야지. 객지에서 사고치면 수습도 힘들어. 이제 니 나이를 생각해’ 꿀꺽 삼킨다.
마침내 파마머리도, 구시렁대던 중노인도 표를 끊고 내 차례다.
스무살 초반의 여직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와 태도로  미리 예약해 둔 표를 끊는다.
“고생 많아요. 어르신들이라 힘들겠어요”
마지막 인사만 모두가 들으란 듯이 크게 하고 버스로 돌아왔다. 항구로 올 때까지는 몰랐는데 파마머리가 내 좌석 옆의 뒷자리다.
“아니 도대체 표 끊는데 얼마나 걸린거야? 사람을 더 쓰든지… 컴퓨터는 무슨 컴퓨터... 젠장” 또 시작이다. 버스기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인다.
또 삼켰던 욱이 튀어나오려는 걸 한번 더 삼킨다. ‘참을 인자 세개면 살인도 면하다고 했느니….’

나머지 승객을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버스에 탄 또 다른 사내가 내려버린다.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느니 선착장까지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아니 선착장이 얼마나 먼지 알고…. 곧 출발하면 되는데…..”
버스기사가 말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더니 곧이어
“참 사람들이 각양각색이죠. 그죠?” 그냥 웃고 만다.
각양각색, 제각각, 제멋대로가 맞다. 크루선은 11시 출발이다. 10시도 안됐으니 시간 여유는 충분하다.

크루즈선은 생각했던 것 보다 크다. 유럽 여행 중에 노르웨이에서 독일로 넘어올 때 탔던 크루즈 선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것 같았다. 길이 170m 2만톤급, 1200명의 여객과 7500톤을 화물을 싣는다고 나와있다. 입장하는 사다리는 5층 데크로 이어진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6,7,8층이 선실이고 4층은 선원 선실, 그 아래는 화물칸이라고 한다. 그러니 9층 건물 크기의 배다.
말하자면 5층이 이 배의 로비인 셈이다.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고 편의점, 작은 커피숍 그리고 대식당이 다 5층에 있다.


나는 6층 6인용 객실이다. 오늘 아침 전화예약을 할 때 안내 여직원이 그랬다.
“6인용이시면 인(in)으로 하셔도 되시겠네예. 밤이라서 어차피 창밖은 안보이거든예. 인(in)이 더 싸고예”
맞는 말이다. 친절하게도 내 주머니 사정까지 챙겨주다니. 얼른 인(in)으로 예약했다. 바다로 창이 나 있는 객실은 씨(sea)다.

5층 데크의 여러 시설은 붐볐다. 특히 대식당은 시끌벅적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모두들 마스크는 썼지만 코로나를 잠시 깜빡했다. 메뉴는 편육, 오뎅, 치킨과 생맥주다. 철이 그래서인지 오뎅이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다.
북유럽에서 탔던 크루즈에는 고급 부페가 있었다. 엄청 큰 결심을 하고 우리 가족은 거기서 식사를 했다. 여행 중 최고의 만찬이었고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이었다. 그 럭셔리한 식사시간을 방해한 것은 중국 관광객이었다. 지배인에게 항의하는 승객들이 꽤 있었는데 통제가 안됐다. “깐베이”를 얼마나 외쳐대던지. 그것도 랍스터와 와인이 무제한인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때에 비하면 양반인데다가 삼삼오오 웅성거리는 정도다.

객실로 찾아갔다. 먼저 온 한 승객이 있었다. 내 나이 또래쯤 돼 보이는 야구모자를 쓴 사내다. 멋쩍은 인사를 나누고 내 침대에 짐을 푸는데 마침 그와 마주보는 1층 침대다.
“관광입니꺼?” 그가 묻는다.
“관광이라… 뭐 그런 셈이죠. 며칠 묵으려고요. 근데 관광이신 것 같지는 않은데…. 울릉도 주민이세요?”
“어데예. 일하러 갑니더. 거기서 일해예”
야구모자 사내는 울릉도 항만 조성공사에서 보도블럭을 깐다고 했다. 벌써 햇수로 꽤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건설회사 소속이겠습니다. 휴가 다녀 오시는 겁니까?”
“예. 회사일 하는 기지예. 두 달만에 집에 갔다가 오는 겁니더. 집이 부산이거든예.”
"아 그러시구나. 그럼 숙식은?”
“거 다 있심니더. 따로 숙소가 만들어져 있고예…. 거 있는 울릉도 항구들 보도블럭은 제가 다 깔았심니더. 겨울에는 눈이 마이 와갖고 좀 쉬지예. 겨울에는 블록 못깔아예”
같은 한국 땅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밥벌이를 하는 가장의 회한이 굵은 손마디에 새겨져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나누는데 다른 승객들이 들어온다. 이번에는 다들 젊은 친구들이다.
손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듯한 주전부리 과자와 음료수가 봉지 밖으로 고개를 삐죽히 내밀고 있다. 우리는 대화를 그치고 야구모자는 TV 뉴스를 시청하고 나는 노트북을 꺼낸다. 선실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래도 침대에서 노트북을 배개에 받친 자세는 불편하다.

노트북을 들고 대식당으로 간다. 아직 손님들은 많다. 테이블마다 캔맥주가 수북히 쌓여간다. 창가 쪽 자리 몇 개가 비었다. 콘센트가 있는 자리에 앉아 타이핑을 한다.
“영업 끝났습니다. 자리 정리해주세요. 영업은 12시까지 입니다. 자리 정리 부탁드립니다.”
밤새 영업하는 줄 알았는데 대식당은 자정까지만 하는 모양이다.
승객들이 빠져 나가는 자리를 직원 두 사람이 자리를 정돈하고 쓰레기를 치운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내가 앉은 테이블의 의자들까지 정리를 한다. 그리고 쓰레기를 담던 직원에게 다가가 묻는다.
“수고하십니다. 근데 혹시 여기처럼 작업할 수 있는 데가 없을까요?”
“잠깐만요….” 뜸을 들인다. 그 사이 마지막 승객 너댓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저어기 저어기 가서 쓰이소” 목소리를 낮춰 구석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고맙다. 다른 승객들이 들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마침내 대 식당에는 나만 남았다. 드문드문 등 몇 개만 켜두고 직원들까지 퇴장했다. 울릉도에 닿기도 전에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내가 얘기를 나누거나 만난 사람들, 승선예약을 해 준 안내 직원과 물회 식당 주인과 같은 객실 사내와 대식당 직원 덕이다. 그들이 불쾌했던 기억을 지워줬다.
세상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눈에 띄길 바라지 않고, 조용조용 말을 해서 그렇지.

작가의 이전글 요양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