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Nov 16. 2021

나는 안울어

울릉도

자연도 연주를 한다. 아침부터 바람이 심상찮다. 밤을 건너온 크루즈선에서 뜬 눈으로 보낸 터라 오늘은 쉬엄 쉬엄 지내자고 작정했다.

울릉도에는 섬을 일주하는 버스가 다닌다. 노선은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두 갈래다.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도동에서 출발해서 한바퀴 도는 코스와 내륙인 나라분지와 연결되는 천부를 출발해 천부에 도착하는 코스다.
그와 별도로 천부에서 나라분지로 가는 노선은 직행인 두 코스가 있다.

나는 아직 주변에 변변한 식당조차 갖춰지지 않은 사동에 여장을 풀었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도동과 저동의 숙소를 이용한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려 섬을 찾는데 다시 그 속에 파묻히고 싶진 않다.  
동쪽바다에 면한 저동항과 도동항을 지나면 남쪽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사동항이 있다.
그러니까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도동 바로 다음의 기착지가 사동이고, 거꾸로 동쪽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종점인 도동 직전이 사동이다.

당연히 멀리 돌아가는 코스의 버스를 타야한다. 사동항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시간표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
“기사님 태하 거쳐 저동으로 가는 버스 맞죠”
교통카드를 찍으려는데 기사가 카드단말기를 손등으로 막는다.
“이 차 아니고 바로 뒤에 오는 버스 올거요. 반대편”
‘좀 친절하게 손으로 막기 전에 이유부터 말하면 어디나 덧나나?’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바람이 심하게 분다. 이내 다음 버스가 온다. 지나치려는 걸 쫓아가서 잡았다. 정류장이 도로변이 아니라 선착장 안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있어 내가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어젯밤 인터넷에 바다쪽 창가에 앉으라는 여행팁이 있었다. 승객은 나와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뿐이다. 그런데 차장에 비 얼룩이 심하다. 산뜻한 출발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바람이 심해서인지 해안가 바위를 때리는 파도는 시랍다. 멀리서부터 너울이 점차 높아지다 바위에 부서지는 남해안의 파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부자리 펴듯 부드럽게 일렁이듯 밀려와 바위 귀싸대기를 오지게 올려 붙인다. 파도는 포말도 되기 전에 분무기를 뿌린 듯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파도를 찍으려는데 차창이 뿌연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차장을 열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열었다 닫기를 두 번 했나 보다.
“문닫으소. 바람이 이래 부는데 와 자꾸 문을 닫았다 여는고 모르겄네. 거참” 기사가 퉁명스럽게 소리친다.
왠지 이 곳에서 만난 사내들은 말투가 갯바위처럼 모가 나고, 깨지는 파도 조각처럼 말의 앞뒤를 날려버린다. 직전에 잘못 탈 뻔한 버스 기사도, 아침에 나를 방으로 안내한 어르신도 그랬다. 출입문 가장 가까운 방을 지정해 주시길래
“어르신 저 맨 뒷방을 쓰면 안될까요?” 내가 첫 투숙객이니 가능할 것 같아서 여쭤본 것이다.
“안돼” 딱 두 글자 안돼.
저녁에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다가 알았다. 안에 화장실이 딸린 4인용 방은 가족단위 투숙객용이라는 것을. 역시 안면 트지 않은 사람끼리는 두괄식보다는 미괄식이 낫다.

아무튼 차창 문을 여는 것은 포기했는데 기사가 틀어 놓은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 오래된 유행가의 색스폰 연주다.
어제 불측한 파마머리 사내의 핸드폰 벨소리는 뽕짝이었다. 버스 안에서 느긋하게 받고, 당당하게 통화를 했었다. 뽕짝 파마머리와 색스폰 기사는 헤어스타일만 다른 쌍둥이 같다. 최근 개통한 일주도로는 폭이 좁고 오르내리막도, 굴곡도 심했다. 깍아지른 해안가 절벽 허리를 베어내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하항으로 향하는 서쪽 해안으로 접어들자 파도는 점점 거칠어진다. 파도가 갯바위에 화풀이를 하고서 입에 문 거품이 부글부글 끓으며 멀리 번진다. 여전히 너울은 그리 높지 않은데 앙심을 품었는지 부서져 솟구치는 높이는 남쪽 바다보다 더 높다.

훌라후프마냥 울릉도 해변가를 따라 도는 코스이다 보니 바다로 삐져나온 큰 바위덩어리에 구멍을 뚫은 도로가 많다. 나는 이 위태롭게 보이는 드라이브가 더 좋다.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도로에 이런 바위산을 뚫은 터널이 많았다. 울릉도보다 훨씬 길었다. 파쇄된 모양 그대로 내버려 두고 조명등도 음침하리 만큼 어두웠다. 울릉도 역시 짧은 터널이지만 깨뜨린 모양 그대로 내버려뒀다. 두 유형의 터널이 번갈아 나타난다. 흔히 보는 아치형 터널과 동굴 같은 터널. 조명은 노르웨이보다 밝다. 그래서인지 터널이든, 지그재그 길이든, 산길을 오르내리든 속도는 비슷해 보인다.
노르웨이에서는 터널에 들어서면 속도를 안줄일래야 안줄일 재간이 없다. 갑자기 어두워지는데다 조명까지 침침하니 긴장을 안할 수 없는 것이다.

“어서오이소. 아지매… 저동 갈라꼬요?”
여러 정거장을 거치다 보니 알겠다. 기사는 주민들을 다 안다. 그들에겐 말 대가리에 인사가 붙고 꼬리에 안부도 묻힌다.
또 한가지를 더 알게 됐다. 도로를 만들기에도 폭이 좁다보니 정류장이 제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어떤 데는 산 쪽으로 쑥 파여 들어가 있고 어디서는 진행 방향과 무관하게 삐뚤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정류장은 대개 바다쪽으로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다.
버스는 마주 오는 차량과 마주치면 잠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멈춰 서있는 동안 지겨운 유행가 색소폰 연주는 더 크게 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훨씬 낫다.

천부에서 기사와 비슷한 또래의 중년 사내가 탔다.
“어서 온나. 오데가노?”
“도동 간다”
“오늘은 뭐 사갖고 갈라고?”
두 사내의 대화를 버스 안 승객들이 모두 청취자가 되어 듣는다. 가끔은 끼어들기도 한다. 나만 빼고.  
“오늘 바람 마이 부네”
“말도 마라… 바람, 바람, 아까도 본께 배가 못들어와 갖고 멀찌감치 바다에서 한시간 반을 기다리다 들어 오드만. 저리 파도 치쌌제. 그래도 저동 가모 또 하나도 안친다.”
저만치 코끼리 바위가 보인다. 안내방송이 없어도 이름만 들었어도 알 수 있을 모양새다.
파도는 여전히 거대한 코끼리의 옆구리를 채찍으로 내리친다. 드디어 버스는 관음도가 보이는 섬목을 돌아 저동항으로 향한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다. 동쪽 바다는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다. 파도는 주름치마를 펼쳐 놓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기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바다는 멀리 보이는 시루떡 모양의 죽도처럼 납짝 엎드렸다.
저동항은 울릉도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오징어 잡이의 전진 기지였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울릉도에서…’다. 여느 육지의 항구를 떠올리면 안된다. 오로지 ‘울릉도에서 가장 큰 항구’인 것이다. 울릉도 넓이(72.84 km²)는 여의도(8.4)의 여덟배인데 인구는 네배가 더 적다. (울릉도 9,077  여의도 33,186)

저동과 도동은 울릉도가 찐빵이라면 두 손가락으로 쿡 찌른 그 자리에 들어선 항구들이자 울릉도의 중심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듯 지어진 건물들은 장수 노인의 생일 케이크에 꽂은 초처럼 촘촘히도 박혀있다.
내친 김에 그대로 도동까지 가보기로 했다. 저동 도착 전에 기사와 처음 나 먼저 승차해 있던 할머니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다.
“기사아저씨. 도동까지 가는데 거기 어느 식당이 좋아요?”
“식당예? ㅇㅇㅇ로 가이소. 다른 데는 다 거서 거깁니더. ㅇㅇㅇ가 아지매 음식솜씨도 좋고 반찬도 맛있습니더. 우리 기사들도 거서 묵습니더”
별도의 꽉 짜인 일정이 없는 내 맘대로 여행은 이래서 좋다. 점심은 도동 ㅇㅇㅇ식당으로 정했다. 저동과 도동은 해안산책로가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다. 도동 골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해안산책로를 걸어 다시 저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조금 늦은 점심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산책로로 들어서는데 기상 악화로 철문이 닫혀있다.

ㅇㅇㅇ식당으로 향한다.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어디 있는지 봐뒀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주인 인듯한 아주머니가 등을 보이고 설거지 중이다.
메뉴를 훑는다. 홍합밥이 18,000원이다. 비빔밥에 홍합을 얹었다고 이리 비싸다니 뜨끔하다. 옆에 작고 빨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2인 이상)’ 잘됐다. 1인 상이 되는 산채비빔밥은 10,000이다.
“사장님. 산채비빔밥 하나 주세요”
아주머니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돌아서지 않는다. 그릇 부시는 소리에 내 목소리를 못들었나보다.
볼륨을 높인다. “사장니임~!” 그제서야 돌아본다.
“지금 식사가 안됩니더. 제가 오후에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돼서요”

다시 계획 수정이다. ‘따개비칼국수’를 먹어봐야겠다. 검색해 둔 ‘따개비칼국수’ 식당으로 향한다. 아뿔싸 거기도 문이 닫혔다. 시간은 오후 1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도대체 이 동네 사람들은 오후에 무슨 궐기대회라도 있는 것인가?’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맛이 그 맛이려니 하고 많은 식당 중 한 곳에 들어가 점심을 떼우느냐. 아니면 이번에는 대충 허기를 면하고 작정했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말 것인가. 후자를 택했다.
방송에도 나왔다는 꽈배기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작은 커피숍 입구에 걸린 경고문이 보인다. “꽈배기, 호떡 반입 금지” 참 인심도 박하다.

꼬다가 만 것 같은 꽈배기 하나가 1,000원이다. 공덕동 내 단골 꽈배기 인 아저씨네는 이보다 2배 긴 제대로 꼬아서 끝맺음한 꽈배기가 3개 1,000원이다. 눈물을 삼키고 3개를 3,000원에 샀다.
이제 커피숍을 찾아야 한다. 역시 눈여겨 봐 뒀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간다. 거기라면 커피를 주문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출입문에 인심 사나운 경고문은 없다. 안심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가 나왔다. 꽈배기를 뜯어먹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테이블에 세워진 손바닥 반 만한 아크릴 메뉴판에 눈길이 간다. 거기에 좁쌀만한 글씨가 눈에 띈다.
“외부음식 반입금지” ‘이런 젠장. 장이 꽈배기처럼 꼬이려고 한다.
슬그머니 꽈배기 봉지를 테이블에 벗어 둔 모자 안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이 야박한 인심을 응징하리’ 뜯어낸 꽈배기를 입안에 잽싸게 집어넣고 커피를 마시며 씹는다. 이제 2개째다. 성공이 눈 앞에 있다.
“손님, 저희 가게에서는 외부음식을 드실 수 없습니다”
들켰다. “아.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조용히 커피 컵과 꽈배기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바깥 바람이 차다.

차라리 잘 됐다. 꽈배기 먹다 급체로 헬기 타고 육지병원으로 간 최초의 외지인이 될 뻔했다.
그래도 나는 오늘 바다가 들려주는 장쾌한 교양곡을 들었지 않은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파도를 듣고, 왈츠 춤을 추는 여인의 실크 치마 같은 너울을 보고 호수처럼 잔잔한 휘날레를 구경했으면 됐다.
오늘 바다의 연주는 너무도 훌륭했다. 기립박수 감이다. 그래서 나도 앉지도 못하고 걸으면서 눈물 젖은 꽈배기를 삼켰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각양각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