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Nov 30. 2021

이면

1시간 50분 정도 소요된다는데 거의 절반은 불쾌했다. 원래 계획은 죽도였다. 그런데 섬일주로 바뀌었다.
다음날 나의 여정을 듣던 어르신이 강권을 했다. "거기 뭐 볼 거 있다고... 여기 사는 우리도 바다에서 섬을 보면 얼마나 좋은데.... 섬 돌아보는 배를 타라니까" 마찬가지로 죽도행 배를 타려했던 옆방 청년도 함께 그 얘기를 들었다.
다음날 아침. 선착장에서 나는 마음을 돌렸고, 청년은 원래 계획했던 배를 탔다.

승객 대부분은 중년을 넘긴 단체관광객이었다. 휴가철과 성수기는 피하고, 사람 없는 길로 다니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뭔가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출발하자 불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다들 한 손에 새우깡 봉지를 들고 갈매기 밥을 주느라 여념이 없다. 갑판은 갈매기 사육사를 자처한 그들과 뱃전에 기대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무리들로 법석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섬일주 코스를 택한걸까? 갈매기 밥을 주려고? 아니면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고즈넉한 섬 정취를 만끽하려던 계획이 헝클어져서 부아가 났다.
다행히 갈매기 파동은 그들 손에 있던 새우깡이 떨어지자 가라앉았고, 너울이 일자 셀카찍기도 멈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행복한 행위다. 의미와 즐거움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의미'에도 등급이 있고 '즐거움'은 총천연색이다.
섬 속에서 보던 울릉도와 섬 바깥에서 보는 울릉도는 사뭇 달랐다. 바다도 같은 바다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이면이라고 한다. 여행이든 사건이든 또 다른 면,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 재미를 배가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녔던 유럽국가 중 프랑스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각자의 경험이 다른테니 주관적인 평가일 수 밖에 없다.
사람 살피는게 취미라서 언듯 비치는 특유의 오만함을 느껴서일 수도 있고, 직업적 성향에서 도심 뒷골목의 그다지 상쾌하지 못한 인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가 무척 부럽고 존경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게 된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로 대변되는 역사청산도 그 중 하나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장면 두 가지가 있다.

프랑스 센 강변에 서가처럼 들어선 일단의 건물군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도서관 중 하나인 '미테랑 도서관'이다. 대통령 이름이 붙은 것은 그만큼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책 읽는 역대 대통령이 손에 꼽을 정도인 우리로서는 살짝 부럽다.
프랑스에는 그들이 병인양요 때 수탈해간 외규장각도서를 보관한 아름다운 '리슐리외 국립도서관'도 있다.

그런데 이 국립도서관의 사서 부문 총국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1993년 TGV를 팔러 온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 전달하기로 한 책을 들고 방문한 여성 사서였다. 당시 그녀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외규장각 도서를 품에서 내놓지 않는 바람에 외교적 사안으로 번질 뻔한 해프닝이 있었다. 한국 언론기사에도 보도됐었다
약탈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으려는 행위는 괘씸하지만 그런 중대 사건을 일으킨 공무원이 승진을 거듭할 수 있는 프랑스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미테랑 도서관'보다 높아보였다.

프랑스에는 19세기말 '드뢰퓌스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서 유대인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면서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극심한 정치,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유시민은 그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11가지 장면 중 첫번째로 다루며 '20세기의 개막'을 알린 중대사건이라고 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들끓는 분노와 적개심을 마녀사냥식으로 달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와 군당국, 우익세력의 불순한 의도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드레퓌스의 무고를 밝힌  '피카르'중령이란 사람이 있다.
상부로부터 온갖 탄압과 좌천, 결국은 파면까지 당하면서 양심과 정의를 지켰던 인물이다.
우리나라였다면 이 '피가르' 중령이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그는 복권되어 2계급 승진을 하고 마침내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외교적 사안으로 대통령이 약속한 책을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버틴 일개 사서와 우연히 접한 판결도 끝난 사건을 상부의 지시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문제제기 했던 정보장교.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고 각별히 대우해주는 프랑스 문화와 사회.
나는 내가 겉으로 둘러본 프랑스보다 숨겨진 이면이 더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국어공부는 반듯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