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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Dec 16. 2021

내게 책을 묻지마라

또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칠 뻔 했다. 아침 나절에 책 한 권을 샀다. 정류장에 도착해 전광판을 보니 버스는 22분 뒤에 온다. 배차 간격을 감안하면 막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늘 그랬듯 봉투를 받지 않아서 손에는 책이 그대로 들려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동안 광역버스, 시내버스가 내 발치 앞을 지나갔다. 버스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편안한 시선에 내 모습은 어김없이 걸려들 것이다. 그래도 20여분은 그저 멍하니 기다리기에는 무료한 시간이다.
서문에 이어 초입에 들어서서 흥미를 느끼려던 참이었다. 문득 얼마나 남았을까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기다리던 버스의 빨간 번호판이 쓰윽 지나간다. 부리나케 뛰어가서 올라탔다.
좌석에 앉아 한숨 돌리며 생각했다. 지루하게 여겼던 22분이 그새 지나간 것이다.  시간은 물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게 분명하다.

대선주자와 대학생이 주고받은 문답이 화제다. 질문은 “’삼국지’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은? 특별히 없다면 좋아하는 문학책이라도?”였다.
이 질문은 상대가 ‘삼국지’정도는 읽었으리라는 전제를 깔고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인물을 통해 알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문학책 역시 마찬가지다. 유명인이나 화제의 인물에게 흔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런데 왜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서 책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아직도 독서량이나 어떤 책을 읽는가 하는 것이 한 인물의 됨됨이를 가늠하는데 주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 의아했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질문이 일면 내 것으로 돌리는 게 편하고 자연스럽다.
일천한 독서 편력에다 그마저도 책을 끼고 다닌 지는 몇 년 정도 밖에 안되는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섣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정류장이나 버스칸에서 책을 펼치는 데 스스럼이 없어진 것은 다행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버스 칸에서 화장을 하거나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는데 오히려 그 때가 조금은 부끄럽다.

독서는 일부러 들여야 하는 습관이지 인간의 본성이나 욕구와는 무관하다.
유대인이 책에 꿀을 발라 아이들에게 건넸다거나 자식의 책만큼은 허리띠를 졸래매서 할부로라도 사줬던 부모 세대의 이야기는 그래서 나왔다.
나는 독서를 취미라고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습관도 들이지 못했다. 아직도 서가를 채운 책들의 상당량은 디자인 관련서적이다. 먹고 살려고, 아쉬워서, 궁금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사 모은 것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책 속에 길이 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역시 전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그보다는 책으로 자신이 바뀌거나 책속의 길이 세상과 이어지지 못하면 안읽느니만 못하다는 김훈 선생의 말을 신뢰한다.
내 주변에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도, 독서가 몸에 배인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씹어서 건네주는 식견을 받아 먹는 것이 더 수월하고, 그들 중 몇몇을 통해 독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게 내게는 더 유용할 지 모른다. 사진과 그림이 거의 전부인 디자인 서적을 넘기며 작품보다는 그들의 생각을 읽는데 희열을 느꼈던 것이 디자이너로서의 나를 조금이나마 성장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내게 가장 많은 삶의 지혜를 주신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고학력인 고졸이지만 책 읽는 모습을 뵌 기억이 별로 없다. 독서량이 엄청 난 내 친구 역시 나와 같은 경우인데 그의 어머니는 까막눈이다.
우리 둘의 대화에 자주 오르는 소재는 어머니를 통해 배운 지혜와 삶의 태도다. 나는 예수나 부처가 대단한 독서가였다는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다.
천장에 맞닿은 서가에 둘러싸인 작은 독서관을 방불케 하는 집무실을 가진 형은 이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고 했다. “책에서 말하는 건 늘 한결같아. 한가지로 수렴되지……” 물론 그렇게 얘기하면서 자주 소포로 책을 보내 주긴 했다.
이 세상에 책이 없었다면 어쩔뻔했나 싶게 책 중독인 후배도 있다. 그는 글을 깨친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했다. 책이 주는 행복감에 도취된 모습에 경외감마저 느끼고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면서도 녹록하지 않은 현실과 불화하고 힘겨워하는 장면에서는 애석하고 안타깝다.

그런데 이도저도 아닌 한심한 부류가 있다. 차츰 더 강력한 기능을 장착해가는 아이언 맨이나 무기 아이템을 늘리는 프로게이머처럼 읽은 책의 권수를 훈장처럼 치렁치렁 매다는 사람이다. 대개 그 제복을 벗으면 볼품없는 앙상한 몰골이 드러나 측은해질 지경이다. 의외로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뇌만 부풀어 있고 머리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소위 먹물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에게 많다. 그들의 공개되는 말과 글은 지당하고 흠결이 없다. 읽은 책의 권수만큼 뇌 주름이 잡혔고, 뇌를 물들인 성현과 작가의 생각을 전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상 자신의 내면은 턱없이 빈약하거나 위선적이어서 무심결에 이기심과 물욕이 꿈틀대는 속내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조소를 금할 수 없으며 가소롭기까지 하다.
이럴 때 책과 지식은 저속한 자신을 감추는 갑옷으로 바뀐다. 심지어 상대을 향해 날리는 표창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독서의 무용론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로 인해 갖추게 되는 식견의 부질없음을 토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있는 경지나 입장도 아닌 것도 잘 안다.
그보다는 독서나 지식의 유해성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남을 현혹하는 도구로 쓰여지거나 자신만을 위해 쓰여진다면 차라리 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거나 미욱한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권의 책이 자신이 두른 갑옷의 비늘 하나로 기워지지 않고 글이 종이에 스민 잉크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 체화되어 실천으로 이어질 때만 그 가치가 빛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탁월한 전공과 비범함보다는 인간적 고뇌와 나약함을 토로한 난중일기와 험난한 여정을 자처한 열하일기가 지금도 읽히고, 누구보다 다독가였던 박경리 선생과 김윤식 교수의 탁견과 삶이 귀감이 되는 이유다.
실천 없는 이론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유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을 깨치지 못한 무지렁이에게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 자신이 몸으로 책을 썼거나 쓰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고, 해박한 지식인이나 작가에게 낙담하는 것은 기름칠한 두뇌에서 나온 공허한 말에 불과하고 마음을 흔드는 진심과 실천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손 끝을 쫓아 글을 깨치기 시작한 아이는 제 눈에 들어온 가게 간판을 큰 소리로 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의 책읽기는 책에 떨어뜨린 꿀을 쫓아 기어가는 어린 아이의 그것과 진배없다.
아직도 책보다는 영화나 동영상이 재미있고, 습관도 안됐기에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그럴 단계도 아니다. 매번 젖은 장작에 불 붙이는 심정이 되어서 언제 어디서라도 앞부분을 읽어 흥미를 당겨야 내쳐 마지막까지 수월하게 읽게 되니 그렇게 할 뿐이다. 그래도 자신의 수준을 모르거나 과시용으로 책을 앞세우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우연히도 오늘 읽던 책 제목이 <나라서 다행이다 / 크리스토프 앙드레>였다.
독서에 관해서는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내 생은 끝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저 이유식 단계는 끝내고 싶다는 바램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내 경험상 독서량이 많고 달변이어서 상대에게 이끌린 경우보다 평소 대화와 무심한 행동에서 존경심을 품다가 나중에서야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을 알게 된 상대가 어김없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감명깊게 읽은 책이나 위인을 굳이 물을 이유가 없다. 그의 어제를 알며 오늘을 보고 있고 어떻게 내일을 말하는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온몸으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알아채지 못하거나 외면할 뿐이다.
삼국지와 문학책을 읽었든 안읽었든 상관없다. 노래 가사에도 있다. 사랑이 떠나가도 당장에 죽을 것 같아도 '밥만 잘 먹는 존재' 또한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삶 혹은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책을 써내려가고 있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해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알 수 없다면 자신의 부덕과 자질을 탓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책을 가까이 하고 공부를 계속하려는 동기라도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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